속헹의 죽음, 그 후 [왜냐면]


김동수 | 르포작가·‘유령들: 어느 대학 청소노동자 이야기’ 저자
2020년 겨울, 캄보디아 출신 누온 속헹은 영하 18도의 강추위에 변변한 난방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비닐하우스에서 자다 숨졌다. 이 비닐하우스는 그가 경기 포천에서 일하던 한 농장의 고용주가 마련해준 숙소였다. 이주민 단체들은 그가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숙소에서 지낸 이유를 그의 비자에서 찾았다.
그는 비전문취업(E-9) 비자를 발급받고 한국에서 4년10개월 가까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비자를 가진 노동자는 ‘고용주의 허가’를 받아야 퇴사할 수 있는 고용허가제의 적용을 받는다. 단, 고용주에게 유책이 있으면 고용주의 허가는 필요 없지만, 이번에는 ‘정부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결국 자신의 의지로는 이직할 수 없는 것이다.
외국인고용법 25조 1항 2호의 ‘외국인근로자의 책임이 아닌 사업장 변경 사유’(고용노동부 고시)에 따르면, 고용주의 유책 사유로는 휴·폐업, 근로조건 위반, 부당한 처우 등이 있다. 특히 근로조건 위반(제4조)과 부당한 처우(제5조) 조항은 각각의 항목에 걸맞은 사례들을 꽤 자세하게 유형화해 놓았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어떤 착취를 자주 당하는지 잘 보여주는 일종의 기록물로 느껴질 정도다. 예컨대 근로조건 위반 항목에서 임금 체불로 일터 변경을 신청할 수 있는 유형만 총 4가지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월 임금의 10% 이상 금액을 4개월 넘도록 지급받지 못하거나 미루어지다 받은 상태여야 한다.
물론 일터 변경 사유에 해당해도, 증거 제출, 고용주 의견 청취 등 행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이 언제 끝날지도, 사업장 변경이 허가될지도 모르는 와중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고용주와 분리되지도 못한다. 열악한 근로조건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 도리어 심리적 고통을 가중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당장은 ‘좀 더 참아보자’는 마음이 샘솟을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퇴사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고용 구조는 일터에 미치는 사용자의 권력을 더 강화시키는 지렛대 역할을 한다. 속헹이 일하던 농장도 그의 사망 이후 벌어진 조사에서 몇가지 노동법 위반 사례가 더 발견됐다.
그런데 노동법‘만’ 잘 지키는 일터라고 열악하지 않을까? 그럴 리 없다. 대표적으로, 3디(D) 업종이자 이주민 고용률이 높은 농·어업 직종에 한해 근로기준법 일부 조항이 예외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E-9 비자를 가진 농·어업 종사자는 고용주가 그 일부 조항을 상습적으로 어겨도 일터 변경 신청이 불가능한 것이다.
속헹의 죽음 이후 고용허가제 폐지 여론이 들끓었지만, 정부와 국회는 ‘개선’에 더 방점을 두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었을까? 고용노동부 고시가 개정됐다. 속헹 사망 전인 2018년부터 이미 비닐하우스 숙소의 제공은 고용주의 유책 사유였다. 하지만 ‘정부당국이 자율 개선을 명령했는데도 사용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정해진 기간에 이행하지 않을 경우’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이 조항의 단서를 없앴다. 사용자에게 개선할 기회를 한번 더 주었던 이전과 달리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를 도입한 셈이다. 하지만 이주노동자가 행정 절차를 거친 뒤에 최종적으로 정부당국의 퇴사 허락을 받아야 하는 조건은 여전히 유지했다. 고용허가제의 핵심은 전혀 건들지 않았던 것이다. 연이어 헌법재판소도 고용허가제가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최근 전남이주노동인권네트워크는 전남 나주의 한 벽돌 공장에서 일하던 스리랑카 출신 노동자가 찍힌 영상을 공개했다. 동료들이 그를 벽돌 꾸러미에 비닐로 포박한 것도 모자라, 지게차로 들어 올리고 질주하듯 이동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인권 유린을 넘어 산재가 발생할 뻔한 폭력적 상황을 자행했던 것이다. 그 역시 E-9 비자로 한국에 체류 중이었다. ‘지게차 사건’도 고용노동부 고시의 부당한 처우 항목에 딱 들어맞는 사례였다. 그런데 폭로란 방법은 빠르게 인권 유린 현장을 벗어날 수 있는 기폭제가 됐다. 그가 사장의 승낙을 얻어내 일터 변경을 신청한 지 단 하루 만에 고용노동부의 허가를 받았다. 대통령이 분노한 덕이었다. 보통의 행정 절차를 차곡차곡 밟았다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속도였으며 사업장 변경 신청을 받아들였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정부는 ‘지게차 사건’ 이후 고용허가제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가장 우려되는 일은 속헹이 사망한 후 그랬듯 고용허가제의 근본적인 문제는 내버려둔 채 고용노동부 고시의 문구만 추가·수정하고 마는 것이다. 아무리 그 고시에 노동자에게 유리한 조건이 가득 차 있어도, 퇴사를 허가받아야 하는 구조 속에서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보다 못한 결과를 낳는다. 어떤 개선책도 일터의 자유로운 이동보다 노동 착취에서 벗어나기 쉬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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