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임윤찬’ 김세현, 클래식계 ‘새로운 스타’ 등장 [고승희의 리와인드]

고승희 2025. 8. 11.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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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티보 콩쿠르 우승한 김세현 리사이틀
모차르트부터 포레, 쇼팽, 리스트까지
건반 위의 팔색조…스타 탄생의 서막
만 17세에 프랑스 롱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세현의 리사이틀 [예술의전당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세이 미야케의 플리츠 상하의를 입은 ‘소년 피아니스트’는 긴장한 기색도 없이 걸어 나왔다. 600석을 꽉 채운 관객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검은 손수건으로 건반을 쓱쓱 닦아내더니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3번을 시작했다.

첫 음부터 남달랐다. 어린 피아니스트의 패기와 강력한 힘, 음악 안에서 한없이 자유를 만끽하는 개성이 연주 내내 넘실댔다. 피아노 위에서 마음껏 노니는 천진함과 대성한 피아니스트들에게서 포착됐던 광기, 나이를 의심케 하는 성숙한 감정과 그와는 반대로 나이를 역행하는 개구진 순수성이 한데 버무려져 피아니스트 김세현의 오늘을 들려줬다. 지난 8일 2025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의 일환으로 열린 리사이틀에서다.

“피아니스트가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면 2000명의 관객을 놀라게 하는 연주를 선보일 수 있겠지만, 자신을 버리고 음악을 섬기는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는다면 한 명 한 명의 청중을 변화하게 만드는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겐 후자가 더 의미 있는 음악이에요.”

열여덟 생일을 하루 앞두고 나간 프랑스 롱티보 콩쿠르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뒤 가진 뒤늦은 간담회에서 김세현은 이렇게 말했다. 일종의 ‘금의환향’ 격 리사이틀에서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증명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세현의 이번 리사이틀은 여러모로 화제였다. 예술의전당에선 차세대 연주자로 김세현을 주목, 콩쿠르 참가 전부터 이날 공연을 국제음악제의 주요 기획으로 배치했다. 이제 시작하는 ‘소년 피아니스트’인 만큼 600석의 IBK챔버홀이 안성맞춤일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만 17세에 프랑스 롱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세현의 리사이틀 [예술의전당 제공]

반전은 3~4개월에 걸쳐 나타났다. 2001년 열일곱 살의 나이로 이 콩쿠르에서 우승한 원조 ‘스타 피아니스트’ 임동혁처럼 김세현이 같은 나이로 1위에 올랐다. 심지어 청중상, 평론가상, 음악학교 학생들이 주는 상까지 휩쓸며 세계 무대에 강력한 눈도장을 찍었다. 이후 티켓 오픈과 함께 클래식 애호가들이 모여들며 7월 중순 일찌감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리사이틀 당일엔 클래식 음악계의 신성을 목도하려는 관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3살 위의 임윤찬을 “매우 존경하는 선배”고 말하는 김세현은 실제로 음악계가 주목하는 ‘제2의 임윤찬’이다. 현재 김세현은 미국 하버드에서 영문학 학사와 임윤찬이 재학 중인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석사 과정을 동시에 밟고 있다. 뉴잉글랜드에선 피아니스트 백혜선과 당타이손을 사사하고 있다.

김세현 음악의 독창성은 명민한 해석과 풍부한 감성에서 나온다. 모차르트, 포레, 쇼팽, 리스트로 이어진 프로그램을 짠 것도 상당히 영리한 선택이었다. 그는 작품마다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며 무대 위의 ‘팔색조’ 면모를 발휘했다.

역동적으로 시작한 모차르트 소나타 3번에선 악장마다 풍부한 표현력으로 음악을 그려갔다. 1악장이 선명한 리듬감을 강조했다면,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연주해야 하는 2악장에선 달콤한 감정들이 오페라의 아리아 같은 서정성을 입고 춤을 췄다. 대상이 누구든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설렘이 건반 위의 미소가 돼 떠다녔다. 연주 내내 허공을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론도 형식의 경쾌한 3악장에선 재기발랄한 10대의 표현력을 엿볼 수 있었다.

만 17세에 프랑스 롱티보 콩쿠르에서 우승한 피아니스트 김세현의 리사이틀 [예술의전당 제공]

포레의 ‘뱃노래’와 즉흥곡에선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단단한 밀도로 만들어내는 터치는 뱃머리와 맞부딪히는 깊고 푸른 물길을 연상케 했다. 묵직한 저음에서 시작해 유려한 고음으로 번져가는 소리는 유유히 흐르는 물결의 청각화였다.

풍성한 리듬과 감정의 향연은 쇼팽의 ‘마주르카’에서 만날 수 있었고, 스케르초 3번에선 다양한 음역대를 오가며 감정적 격류를 만끽하게 해줬다. 그는 음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았지만 음정과 박자에 강박을 지닌 연주자는 아니었다. 주어진 악보를 경외로 바라보되, 그 안에서도 자유롭게 자신을 찾아갔다.

2부는 30분간 쉼 없이 이어진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였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건반의 향연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봄날의 꽃봉오리나 잎사귀가 돋아나는 초목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풍부한 표현력과 기교, 다이내믹, 거기에 더한 예측 불가능한 템포와 전개는 김세현 음악에 기묘한 차별성을 더했다. 듣기에 따라 호불호가 나올 수 있을 대목이었으나 그것이 김세현 음악이 가진 힘이기도 했다.

10대 같지 않은 진중한 태도로 음악을 이야기하던 그는 무대 위에서 배우였고 무용수였으며 오페라 가수였다. 그의 음악은 천진한 얼굴을 한 아이였다가, 사랑을 막 시작한 소년이었고, 격정으로 내달리는 청년이었다가, 고독의 밤으로 향해가는 중년이었다. 그러다 긴 시간을 관조해 온 노년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음이 눌리고 쇼팽 야상곡 20번, 리스트 ‘사랑의 꿈’ 3번, 알렉시스 바이젠베르크의 ‘4월의 파리에서’까지 세 곡의 앙코르도 마치자 관객들은 만족감과 아쉬움을 뒤섞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객석에 자리한 그의 스승인 피아니스트 백혜선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백혜선은 공연 뒤 “피아노를 치는 것이 가장 즐겁고 재밌다고 하는 아이”라며 “오늘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잘 마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의 관객들은 김세현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지루할 틈 없이 채워진 김세현의 시간은 이제야 서막이 올려졌음을 알렸다. 조만간 다가올 더 찬란한 날들이 이곳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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