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사법 불신 깬 美 대법관의 소신

미국 사회는 지난달 말 상원이 인준한 한 연방 항소법원 판사 임명 문제로 시끄럽다. 언뜻 보면 판사 한 명 채워 넣는 일인데 논란이 적지 않은 것은, 그가 작년 대선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형사 사건을 담당한 개인 변호사였다는 점 때문이다. 보은(報恩) 인사를 넘어 트럼프가 계획대로 사법부를 장악해 가는 단면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방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된 주인공 에밀 보브 법무부 수석 부차관보는 트럼프가 작년 이른바 ‘성 추문 입막음 의혹’ 사건으로 맨해튼 형사법원 피고인석에 앉아 있을 때 늘 그의 옆을 지킨 충성파다. 트럼프는 대선 후 보브를 법무부 고위직에 앉혔고, 이번엔 연방 항소법원 판사로 지명했다. 이 자리는 언제든지 미 최고 법원인 연방 대법관 후보가 될 수 있는 요직으로 꼽힌다. 법무부 장차관 자리에 자신의 변호인단을 임명한 데 이어 법원에도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인사를 꽂아 넣었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기본 원칙인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수사 공정성도 의심받을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미국도 독재에 가까운 일부 중남미 국가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미국을 미국답게 만드는 힘은 예상을 뒤엎는 반전에 있다. 트럼프는 1기 행정부 시절인 2020년 10월 진보 진영의 상징적 인물이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으로 에이미 코니 배럿을 임명했다. 배럿은 1990년대 말 강경 보수 성향이자 헌법 원문주의의 대표 법관인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의 법률 서기로 일한 보수파. 배럿이 대법관이 되면서 연방 대법원은 구성이 보수 우위로 기울었다.
그런데 연방 대법관 배럿의 판결은 보수 일변도가 아니었다. 낙태권을 보장하는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소수 인종 우대 정책 폐지 등 보수 진영 핵심 가치를 반영하는 판결에서 그는 보수 깃발을 들었다. 반면 올해 1월 자신의 형사 사건 선고를 연기해 달라며 트럼프가 대법원에 낸 긴급 신청 사건에서 배럿은 진보 대법관과 함께 거부 표시를 했다. 트럼프 정부가 ‘세금 낭비’라며 추진한 국제개발처 원조 프로그램 동결 시도에도 반대했다. 배럿의 선택이 판결을 좌지우지하자 일부 보수층은 “배신자”라고 비판했지만, 동시에 좌우 진영에선 “배럿은 이념에 사로잡힌 판사가 아니다”라는 호평을 받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을 잡은 정치인은 사법부를 통제하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지는 실제 공직을 맡은 이들의 주체적 행동에 달렸다는 점을 배럿은 보여준다. 그가 이념적으로 편향될 것이라는 편견을 깨자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높아졌다. 사법 불신이 가득하고 정치적으로 분열돼 있는 한국에도 배럿처럼 소신 있는 법관이 나오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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