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넘기기] 날마다 벼랑인 삶도 환하게 웃을 수 있어요
찬란한 삶 너머에 있는 애잔한 것에 애정
역사의 강을 건너며 묻혀진 것들에 눈길

요즘 시조의 매력에 빠졌다. 읽어도 읽어도 남아있는, 말을 다 내뱉지 않아서 스스로 궁금해서 더 생각하게 한다. 절제를 다시 재구성해 보는 맛이 있다. 압축미와 운율은 시도 가지고 있으나 시조는 좀 더 형식에 제약이 있어서,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래서 틈을 보이지 않는 신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옥영숙 시조시인의 시조집 '복사꽃 소금'을 무심히 읽어갈 때는 몰랐다.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이 쓴 시조집이 잘 읽혔다. 반복해서 읽을수록 생각의 속도를 조절했다. 다시 잡은 시집 1권을 제대로 읽는 데는 5시간이 더 걸렸다. 역사적인 것도 찾아보고, 순우리말 시어도 찾고,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도 가봤다. 시어의 구절구절을 도저히 무심히 넘길 수 없었다.
역사적 사건이든 여행지에서 본 것이든, 답사를 한 것이든 옥영숙 시인은 단단한 서사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반복해서 읽는 동안 절로 전해져 왔다. 마치 흙을 고르고, 반죽하고, 빚고, 굽고, 이 많은 노고를 통해 백자를 빚어낸 것 같다. 성현의 말씀이 간단한 말로 전해져 오지만 그 말씀을 음미하고 또 음미해야 그 뜻이 드러난다. 사골을 우리고 우려야 국물 맛이 제대로 나는 것처럼 옥 시인의 시는 그냥 줄줄 읽어 나가면 안 된다. 멈추고 또 멈추면서 플롯을 따라가고, 새롭고 낯선 시어를 찾아내 색과 빛을 입힌 살아 있는 시어 속에서 유영해야 한다.
옥 시인의 시조는 찬란하게 빛나는 것 너머를 조명한다.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주목받지 못하는 것들을 데려온다. '충노대갑지비忠奴大甲之碑''에서는 '낮에도 주목받지 못한 빗돌을 위무한다', '난에서 주인은 명성을 얻었으나 주인을 지키지 못한 면목 없는 목숨이라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부고를 전해야 한다 힘 있는 주인 편에서 힘들었던 어제와 살아낼 먼먼 날보다 충직한 신념으로 노비는 할 일을 끝내고 검안천에 몸을 던졌다', '어떻게 더 눈부셔야 관심이 쏟아질까' 충노였던 대갑의 충직한 신념과 죽음,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해석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를 고민하게 한다. 늘 역사는 강자를 위한 것이었다. 약자는 그나마 강자를 위해 죽어야 겨우 이름이라도 남길 수 있는 것일까.
어떤 시를 소개해야 할까 망설인다. 메모해 놓은 시가 많아서 그렇다. 사물에 어울리는 시어를 가지고 와 생동감 있게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표현을 몇 번이나 읽고 싶은 부분이 차고 넘쳤다. '고샅길 굽이굽이 내딛는 첫걸음은/ 촘촘히 박음질한 각별한 봄빛이다/ 붉은 저 빗치개 꽂아/ 모시 적삼 얼비쳤다'('붉은점모시나비' 1연) 호랑나비과 모시나비과에 속한 이 나비를 고전미를 가득 담아 표현해냈다. 지나친 외래어와 외국어 사용으로 점점 우리의 아름다운 언어를 쓰지 않는다. 언어는 불러내서 써야 살아난다.
'앞뜰은 백일몽에 먼 밤을 배회하고/ 핏발 선 충절마저 조금씩 사위어가는, 못다 한 말들이 쌓여 저토록 붉었으리'('고려동 배롱나무' 3연) 경남 함안군 산인면에 있는 '고려동 배롱나무'를 고려동학의 역사를 아우르며 울컥하는 감정을 누르며 표현했다.

'탐매를 핑계 삼은 선암사 나들이길/ 산사는 비질 따라 빗살무늬 깔려 있다/ 승선교 용머리 걸어준/ 엽전도 찾아본다// 꽃피는 꿈에 부푼 선암매 돌담길은/ 살에는 꽃샘추위 실눈을 뜨고 있다/ 아직도 참선 중인가/ 범접 못 할 매무시다// 뒤란의 수곽에서 물 한 잔 마셨더니/ 뱃속을 씻어내는 법고 소리 고인 뒷간/ 하초에 길을 터주자 매화꽃이 떨어진다'('아름다운 뒤깐') 이 시는 속세를 떠나 선에 든 경지다.
'보리밭 고랑 안에 고인돌 한 무더기', '하늘과 내통하는 힘이 센 영혼들은',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성혈로 누워 있다'('고인돌 산책' 부분)에서 고인돌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고대 선인들의 고인돌이 오늘 이렇게 우리의 한 부분으로 있음을 말하며 고인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한다.
'등짐 진 소금물은 힘에 부쳐 힘들고/그을린 피부색만큼 매달린 붉은 소금꽃// 바람이 밀고 가는 햇살의 손맛으로/ 오고 간 길 끝에서 꽃잎이 돋았을까/ 우뚝 선 소금고드름 복사꽃으로 환하다'('복사꽃 소금'-옌진 염전, 부분)에서 '바람이 밀고 가는 햇살의 손맛'은 압권이다. 그리고 꽃잎이 돋았다니, 시인의 상상력의 확장은 어디까지인가.
이 시조집에서 색깔이 다른 시조 한 편을 소개한다.
'태오야, 어제 그제 행복한 꿈꾸었어/ 밀밭과 구름 사이 찾아온 까마귀 떼/ 서둘러 화구에 담을 물감을 챙겼단다// 높게 솟은 종탑과 불 꺼진 성당 지나/ 가다가 지친 날은 어디서 돌아설까/ 길 끝에 황금색 들녘 애간장을 녹인다// 먼 이역 낯선 땅은 마음 둘 곳 없어서/ 한낮도 어둠 같아 뭇별을 그려 넣고/ 다락방 창문을 열어 북극성 바라본다'('고흐의 저녁별')이 시는 프랑스까지 가서 고흐의 흔적을 따라서 고흐가 산 주변을 거닐며 화가로서의 삶을 들여다봤다. 마음 둘 곳 없어서 북극성을 바라본 고흐의 고독을 깊게 상기하게 한다.
옥영숙 시조집 '복사꽃 소금'은 온몸으로 세계를 누비고, 지역의 역사를 찾아서 탐구하고, 밀려난 자의 세계를 조명한다. 사물에 새롭고 낯선 시어를 입힌 덕분에 그것들이 새로운 세계 속에 서있다. 때로는 고전적 미를 입혀서 더 낯설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곳이 나의 세계이고 토대이다. 감춰진 존재에 빛을 보내 이 세계로 끌어오는 작업을 한 옥영숙 시인의 시를 한 달 내내 끌어안고 있었다. 깊어지는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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