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의 매일통신] 광복과 망국이 함께하는 8월
주술과 농단이 함께한 세월
반복되는 역사 참담한 국민

지난 5월로 기억한다. 울산에 모처럼 대형 뮤지컬 공연이 있다며 한 지인이 같이 보러가자고 했다. 이문열 원작의 '여우사냥'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 '명성황후'였다. 명성황후. 오래전부터 전국을 순회하는 이 뮤지컬은 시작 당시부터 논란의 역사적 인물을 미화한 작품이라는 설왕설래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춘설이 분분한 봄밤에 고문처럼 앉아 감상할 필요가 있겠냐며 지인의 심기를 건드렸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작품이다.
굳이 명성황후 이야기를 꺼낸 것은 지금이 광복 80주년을 맞는 8월의 한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광복의 함성이 멎을 만 한 시점은 통한의 역사도 있다. 바로 망국의 날인 8월 29일이다. 8월은 그런 시간이다. 광복과 망국이 공존하는 달, 그래서 염천 하늘이 더 우리에게 찌든 땀방울을 맺히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명성황후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10여년 전 언론사 선배 한 분이 필자의 <노스트라다무스 증후군>이라는 칼럼을 들고와서 조선의 국모를 명성황후라고 하지 않고 민비로 격하해 표기한 것은 잘못이라 지적한 기억이 떠오른다.
조선의 마지막을 재촉한 왕, 고종의 왕비였던 인물을 두고 우리는 명성황후라고 부른다. 뮤지컬 때문인지 지금은 민비라는 칭호가 낯설게 느껴지지만 민비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에 왜의 잔당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녀는 피살 당한 뒤 남편인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지위를 격상하면서 황후로 추증해 명성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후대의 역사서에 대한제국의 황후를 명성으로 기록한 것은 정확하다. 물론 그 이전의 기록을 반추할 때 고종의 중전이자 조선의 국모는 중전 민비가 올바른 표현이다. 당시 필자가 조선 망국에 숫가락 하나쯤 보탠 진령군의 망령을 거론하며 민비로 표현한 인물은 고종의 비, 중전 민비가 정확한 호칭이다. 결코 국모를 격하하려는 호칭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둔다.
난세에 득세하는 인물은 딱 두부류다. 바로 간신과 주술사다. 외세의 칼자루를 뒷배로 여긴 민비는 목숨이 위태로운 시절 도망간 장호원에서 주술사와 연이 닿았다. 충주 무당 박창렬이다. 후일 진령군으로 불린 이 주술사는 민비의 불안심리를 적절하게 밀당해 고종의 신임까지 얻었다. 왕은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군호를 내렸고 고종 부부에게 왕의 뒷배는 관운장 지키고 있으니 곧 나라를 살려낸다는 아무말 대잔치를 주술처럼 외우게 했다. 왕과 비는 주술의 힘으로 궁에 사당을 짓고 제를 올렸다. 참으로 가당찮은 일이었다.
망국의 역사에서 국정농단의 중심인 민비를 명성이라는 시호를 붙여 명성황후로 부르지 않는다며 삐죽거리는 선배에게 이런저런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라고 차분하게 일렀지만 '내가 조선의 국모다'로 가슴을 뜨겁게 한 뮤지컬 명성황후를 초연으로 보고 온 선배는 무조건 대한의 마지막 황후였던 민비는 국뽕의 대상일 뿐이었다. 조선조가 망국의 길을 걸었을 때 제대로 역사의 맥락을 살피지 못한 기록과 기억의 흔적은 의외로 많은 오류로 남아 있다. 무능한 고종의 미화는 물론 동학의 녹두장군도 그렇고, 민비도 그런 맥락이다. 그 배경은 의외로 외국인이 남긴 조선 왕실의 기록과 현대에 와서 이른바 막무가내식 '국뽕'들이 만들어낸 역사 왜곡이 그 뿌리다.
1894년 영국 왕립학회 회원 자격으로 조선에 온 여행작가 이사벨라 비숍은 4년 동안 고종과 명성황후를 만나는 등 조선의 곳곳을 누비며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조선을 알렸다. 비숍은 민비의 전담의사였던 언더우드와 왕비를 자주 알현했다. 그 결과물로 서술한 민비에 대한 기록은 꽤 흥미롭다. 비숍은 민비를 평하면서 "그녀는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사교적이었다"라고 적었다. 비숍의 시각은 왕실을 벗어나면 달라졌다. 비숍은 왜가 조선에서 영향력을 넓혀가는 제국주의를 '개혁'이라고 미화하고 조선인을 미개한 민족으로 비하하거나 종교 없이 살아온 민족이라고 평가하는 등 제국주의와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왜곡된 기록을 남겼다. 그런 이중적인 비숍의 저술은 왜가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근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비숍의 왜곡된 시각은 서양인들에게 조선 왕실의 이야기도 변질시켰다. 비숍의 민비에 대한 인물평은 조선 왕실에 여걸이 있다는 식으로 포장됐다. 그런 포장은 거리가 멀수록, 실상이 알려지지 않을수록 확대 재생산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연유로 민비가 왜의 잔당들에게 난자 당했을 때, 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두려워한 왜와 대원군의 야합이 핵심이라는 팩트체크와 달리 무수한 잡설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재생산 됐다. 뮤지컬 명성황후도 바로 그런 '국뽕'과 미화된 인물평이 만든 또다른 목적성의 작품이라 정리하고 싶다.
염천이 지나가는 시점에 굳이 명성황후와 민비, 그리고 진령의 망령까지 소환한 것은 김건희 여사 때문이다. 구속의 기로에 선 김건희를 두고 조선의 마지막 국모였던 민비를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 할 수 있다. 시대와 상황, 인물의 성장 과정을 연결하자면 지극히 부적절한 것이 맞지만 국정농단과 주술의 개입 등을 유추하면 무리한 부분도 아니다. 김 여사는 우리 정치사에서 뉴스의 중심이 된 이후 두 번의 사과를 했다. 그 첫째는 지난 20대 대선이 본격화 될 무렵 허위학력 논란 등이 문제가 될 때였고 두 번째는 바로 지난주 특검에 출석하면서 "저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심려를 끼쳐서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인 장면이었다.
3년전 대선이 시작될 무렵 조용한 내조만 하겠다며 머리를 숙인 김 여사는 한남동 주인이 된 이후 비화폰으로 여러 인물과 은밀한 통화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세간에서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배후에 김 여사의 특검과 명태와 노가리의 찝찝한 뒷담화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특검이 주가조작 문제보다 공천개입이나 법사와 도사들의 분탕질에 더 수사력을 집중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이라는 말이 떠돈다. 참으로 염천 더위에 숨이 퍽퍽 막히는 이야기다. 김진영 편집국장·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