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길잡이 되어볼까 [서울 말고]

한겨레 2025. 8. 1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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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처음으로 혼자 갔던 외국 도시는 덴마크 코펜하겐이었다. 살면서 가본 곳 중에 고향에서 가장 먼 도시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준 종이 지도 하나를 달랑 들고 초보여행자답게 길을 헤매고 있을 때면, ‘좀 도와줄까?’ 하고 다가오는 친절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직도 코펜하겐 구석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여름 부산에도 여행자가 많다. 다른 나라, 지역에서 온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심상치 않은 무더위에도 씩씩하게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본다. 오래전의 나와 달리 지금 부산을 여행하는 이들은 좀처럼 길을 잃지 않을 것 같다.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걷는 그들의 손엔 언제나 든든한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스마트폰에 의지하는 건 이곳에 살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다. 길눈이 어두운 나는 삼 년째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자주 모바일 지도를 연다. 일상에서나 여행에서나 우리에겐 각자 명확한 목적지가 있고, 가장 효율적인 경로로 우리를 안내하는 도구가 있다. 화면 속 화살표를 따라 움직인다면 길을 잃을 일은 거의 없다. 그저 제대로 된 목적지만 정하면 된다.

목적지를 고르기 위해 실제로 그곳에서 보낼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화면 속에서 보내기도 한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고로 알맞은 선택지를 골라야 하니까. 어딜 가야 가장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막힌 분위기를 즐기고, 내게 꼭 맞는 경험을 누릴 수 있을까. 선택을 위해 누군가 남긴 정보들을 끊임없이 읽고 본다. 타인의 후기와 별점, 누군가 찍어 놓은 사진을 훑다 보면 실제로 경험을 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다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최적의 선택지를 고르기 위해 쉼 없이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는 오랜 탐색 끝에야 비로소 그 선택이 실제로도 만족할 만한지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설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무런 정보 없이 실제로 부딪히고 경험하며 실수하고 실망하는 일을 두려워한다. 물건 구매도, 장소 찾기도, 여행도, 일상도, 무엇이든 미리 알아보고 선택하는 게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우연히 새롭게 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사뭇 달라서, 가끔 나는 체험자가 아닌 평가자가 되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먹고 마시고 느끼고 즐겨야 할 것을 충분히 체험하지 못하고 있다는 감각, 조그만 화면으로 미리 보고 짐작한 것과 실제 경험을 자꾸 저울질하고 있다는 느낌에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똑똑하고 유용한 도구가 내게 편익을 제공하는 대가로 인생에서 훨씬 더 크고 중요한 걸 앗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새로운 경험을 온전히 누리는 기쁨, 우연과 실수가 만들어낸 놀라운 재미, 예상치 못한 발견의 즐거움 같은 것들. 이를 대신해 철저한 탐색과 분석과 비교로 꼼꼼하게 짜놓은 최적의 선택 앞에서 과연 나는 충분한 만족을 누리고 있는 걸까.

여행자로 북적이는 팔월의 부산 전포동에서, 한 번쯤 가보려고 했던 카페가 만석인 바람에 우연히 들어오게 된 이층 카페에 앉아 밖을 구경한다. 갑자기 허기가 져서 주문한 생과일 롤케이크와 시원한 차는 놀랍도록 달콤한 여름의 맛이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걷는 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아까 내 모습이 꼭 저랬을까 생각한다.

문득 낯선 코펜하겐에서 뜻밖의 친절을 받고 나서, 한국에 돌아가면 나도 여행자에게 친절해져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지랖 넓은 부산 사람답게 낯선 여행자가 하나를 묻는다면 둘을 알려줄 자신이 있는데, 이 시대에 여행자의 길잡이가 된다는 건 사람에겐 너무 낭만적인 꿈인 걸까. 어디선가 스마트폰과 함께 여행하는 나를 봤을 누군가도 이런 마음으로 아쉬워하고 있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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