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서 ‘인간의 그림’이 사라진다면…내 직업은 어떻게 될까? [6411의 목소리]


강준수(가명) | 게임 원화가
무턱대고 서울로 상경하기처럼 무모한 짓이 있을까요. 제 삶에서 가장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서울엔 게임 회사가 많으니 금방 취업되겠지. 돈도 적당히 모아놨으니 대기업만 골라 느긋하게 구직해도 되겠지. 착각은 금방 깨졌습니다. 게임 취업 플랫폼에 구인 글이 도무지 올라오질 않았습니다. 코로나19가 끝나고 모바일 게임 매출이 급감했기 때문이죠. 게다가 이미지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본격적으로 쓰이면서 게임 원화가는 이중으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인공지능이 기존 일러스트레이터를 전부 대체할 수 있었느냐면, 아닙니다. 유명한 게임들은 유저가 반발하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대놓고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만들고 싶어 했던 모바일 게임 장르는 일러스트의 비중이 막대합니다. 그림이 매출과 결정될 정도로 말입니다. 이를 인공지능으로 생성했다면 돈을 퍼부은 유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다들 알음알음 썼을진 몰라도 대놓고 사용할 순 없었습니다.
문제는 신입을 뽑아서 써야 했던 중소기업입니다. 인디 게임에 그림이란, 필요하긴 하지만 인력을 할애할 정도의 비중은 아니었죠. 구직은 기약이 없었고 반년 동안 면접 본 회사도 세곳뿐이었습니다. 그마저 면접에서 다 떨어졌고요. 한 회사에선 “이 정도 실력으론 바로 실전 투입 못 한다”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모멸감이 치밀었지만 행여 합격시켜 줄까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취업한 동료들 얘기를 들어보니 원화가 이력서가 하루에 수십장 들어온답니다. 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럴수록 열심히 그려서 포트폴리오를 보강해야 했지만 좀처럼 좋은 작품이 안 나왔습니다. 창작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막연함이 고통스러워 펜을 들기가 힘들었습니다.
죽으란 법은 없는 걸까요. 술 없으면 잠도 못 자던 나날을 보내던 중 문자 한통을 받았습니다. 면접 일정 공지였죠. 보이는 회사에 이력서를 몽땅 넣다 보니 어느 회사일지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누구나 이름을 아는 모바일 게임을 만들고 서비스하는 업체였습니다. 직원이 되려면 1차 면접, 2차 면접, 임원 면접까지 거쳐야 했는데요. 제 삶에서 가장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아무리 간절한들 당락은 제가 조종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매일 술을 마셔야만 잠이 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임원 면접까지 마친 당일, 팀장님이 직접 통화를 주셨습니다. “디자인이 굉장히 참신하더라. 같이 일하는 게 기대된다.” 통화를 끊자마자 그 자리에서 눈물이 스콜처럼 떨어졌습니다. 마침내 진짜 게임 원화가가 된 겁니다. 합격 사실을 친구들에게 전하며 다짐했지요. 이 회사에 뼈를 묻겠다고.
이제 입사한 지 1년 반이 되어 갑니다. 저는 현재 그림을 그리고, 캐릭터의 전반적인 디자인부터 어떤 기믹(이목 끌기 전략)이 어울리고, 세계관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할지 결정하는 일을 합니다. 이 노동은 너무나 즐겁습니다. 주말에도 일하고 싶은 기분이라면 믿으시겠는지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로 먹고사는 일만큼 큰 행운이 없습니다. 운이 너무나 좋았던 사람이라 불안도 많습니다. 몇년 뒤에도 제가 좋아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최근 ‘먼저 온 미래’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알파고 등장 이후 승리하기 위해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바둑기사들의 모습이 남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년 뒤 게임 산업에서 인간의 그림이 아예 필요 없어진다면? 펜이 아니라 키보드만 열심히 놀려야 한다면?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으리라 낙관하거나, 비관한 채 다 내팽개쳐두고 싶진 않습니다. 요즘은 일부러 그림과 멀리하고 삽니다. 대신 고등학교 졸업한 뒤 접었던 글쓰기를 다시 하고 있습니다. 제 삶을 언어로 정리하면서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더듬어 찾아보려 합니다. 취업이 되기까지 9년, 취업하고 나서도 1년 남짓 그저 앞만 보고 살았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꿈을 이루려 했건만, 정작 그 과정 내내 행복한 순간은 전무하더군요. 지금은 마냥 평화롭지만 반드시 또 시련의 순간이 오겠지요. 그땐 과거처럼 저 자신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처럼 휘두르지 않으려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가장 확실한 보험은 돈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자아라고 믿습니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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