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정치인 제1 조건은 유머감각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5. 8. 10.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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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고(故) 헨리 키신저와 에릭 슈밋 전 구글 최고경영자, 크레이그 먼디 전 마이크로소프트 CSO가 공저한 ‘새로운 질서’를 휴가 기간에 읽었다. 키신저는 읽을 가치에 관한 한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다. 죽은 이후에 출간된 책에서조차 그는 절반에 가까운 페이지를 접고 줄 긋게 만든다. 키신저가 외교전략가로 둔 큰 체스판에서 한반도는 존중받은 적이 별로 없지만 그는 작가적 재능만으로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 저승에서도 다작하기를!

책의 부제 ‘AI 이후의 생존 전략’에 씌어있듯 이 책은 초지능 AI 시대가 도래했을 때 인류의 선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노동과 자아실현에 관한 문제다. AI가 노동을 대체한다면, 그리하여 인간 지능과 노동의 비용을 0에 가깝게 떨어뜨린다면 인간은 무엇에서 성취감을 맛볼 것인가. ‘그러한 세상에서도 역경을 극복하고, 탁월함을 칭송하고, 두드러진 차이와 다양성에서 자부심을 느끼는 인간의 타고난 본능은 분명 계속될 것’인데 말이다.

저자들은 ‘본능이 발산되는 새로운 채널’을 찾을 것이라 전망한다. 여가를 즐기는 재능이 주목받는 것과 동시에 인간 가치 평가에 있어 호기심·절제력·친절함 같은 덕목들이 사이드 메뉴에서 메인 디시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 ‘인간이 신체를 이용해서 기계의 도움 없이 행하는 초인적인 위업은 더욱 각광받을 것’이다. 리오넬 메시의 드리블 기술, 100m 챔피언의 질주에 매겨지는 몸값은 지금보다 더 뛴다는 얘기다. 블랙핑크도 지금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게 분명하다. ‘잘생김’ ‘개성’ ‘매력’ ‘예능감’은 인류가 AI에 기죽지 않고 뽐낼 수 있는 최고의, 어쩌면 유일한 자질이다.

내 또래 한국 엘리트 평균은 AI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을 것같다. 축구 신경은 개발, 선곡은 평생 조용필, 패션은 유니클로(출세하면 갤럭시). 게다가 다들 비슷하게 못생겼다. 너무 잘 생기면 출세에 지장이라도 생길 분위기다. 가령 ‘그 친구 기자치고는 너무 잘생겼지’ 같은 말이 진지하게 오가던 시절이 있었다. ‘무슨 검사가 노래를 그렇게 잘 불러’ ‘이거이거, 공무원이 이렇게 공 잘 쳐도 되는 거야’. 한국인이 가진 엘리트상은 아이큐만 빼고는 바보 숙맥 칠푼이에 가깝다. 그 아이큐는 AI보다 나을 리 없으니 애오라지 바보 숙맥 칠푼이로 살아가야 한다.

AI시대에 인간을 돋보이게 할 또 하나의 자질은 유머감각이 아닐까 한다. 유머라는 것은 안개처럼 눈앞에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 오묘한 그 무엇이다. 인류가 쓴 모든 만담집을 학습한 AI가 있다고 치자. 나를 웃게 만드는 데는 싱거운 소리를 잘하는 내 친구의 성공확률이 100배 이상 높으리라 확신한다. 유머는 머리가 아니라 경험으로 학습되는 것이다. 또한 공기를 읽는 수완에서 성패가 갈린다. AI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자질이다.

한국 엘리트는 유머 감각에도 문제가 있다. 개중에는 술자리를 제법 떠들썩하게 끌고 가는 사회자가 있다. 그러나 대개는 유머가 아니라 잔을 돌리게 하는 선동 기술 보유자들이다. 그 기술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피곤함이 엄습한다. 피곤을 잊기 위해 들이키니 이래저래 취한다.

휴가 기간에 피곤한 말로 인하여 한잔 생각이 든 적이 몇 번 있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수락연설 기사를 읽다가 이 나라가 문화혁명의 입구에 들어선 느낌을 받았다. 오싹하다.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 나선 김문수 후보는 전한길 등을 ‘면접관’으로 둔 토론회에서 “계엄으로 아무도 안 죽었다”고 한다. 썰렁하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유머감각이 ‘숏’해서 생기는 현상이다. 딴에는 기지를 부리느라고 부렸는데 웃기지도, 공감되지도 않는다.

AI 시대에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인간이 하더라도 그 근거는 대부분 AI에서 나온다. 어쩌면 결정주체 자체가 AI로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 시대에도 인간 정치인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향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준의 유머 감각으로는 곤란하다. AI보다 썰렁하지 않은가.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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