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에서 살 자격이 있을까
남편 공적 권력을 이용해 사적 이익 취한 김건희 여사
김건희 여사 줄 대서 출세하고 민원하고 돈 번 공범들
부패 구조에 파묻혀 사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 수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는 지하 통로가 있습니다. 본관과 국회도서관, 의원 회관, 소통관을 연결하는 길입니다. 지하 통로 벽에는 옛날 정치인들의 사진을 많이 걸어 놓았습니다.
지하 통로를 지날 때마다 제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는 사진이 있습니다. 43살의 젊은 노무현 의원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 둘째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는 사진입니다.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1988. 12. 31. 헌정 사상 첫 텔레비전 생중계된 5공 청문회 당시 가장 많은 뉴스를 남긴 노무현 초선 의원. 이후 제16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이 사진은 1988년이 아니라 1989년 12월31일 국회 ‘5공 특위’ ‘5·18 특위’ 연석회의 장면입니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1988년 13대 국회는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였습니다. 민심은 ‘5공 청산’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8년 11월23일 연희동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한 뒤 백담사로 떠났습니다. 1989년에도 5공 청산을 요구하는 민심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9년 12월31일 백담사에서 내려와 국회 ‘5공 특위’ ‘5·18 특위’ 연석회의에 출석해 증언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뻔뻔한 증언을 이어가자 평민당 정상용 의원과 이철용 의원이 거세게 항의했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퇴장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통일민주당 초선 노무현 의원은 분노에 차서 자신의 명패를 집어 던졌습니다. 노무현 의원은 잠시 뒤 신상 발언을 통해 명패를 집어 던진 행위에 대해 사과했지만, 이 사건 덕분에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정치인’으로 각인됐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우리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입니다. 한국일보가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대 대통령 중에서 누구를 좋아하는지 호감도를 조사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40%로 압도적인 1위였습니다. 그 다음은 박정희 대통령 24%, 김대중 대통령 10%, 문재인 대통령 6% 순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랑받는 이유는 복합적일 것입니다.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도전하던 당당함, 극적인 대통령 당선 과정, 퇴임 이후의 귀향과 비극적인 죽음 등이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2002년 대선에 도전하면서 그가 내세웠던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한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구속영장 심사가 12일 법원에서 열립니다. 아마도 영장이 발부될 것입니다. 김건희 특검의 수사 대상은 모두 16가지입니다. 이 가운데 이번 구속영장에 포함된 범죄 혐의는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 명품 가방과 다이아몬드 목걸이 등 금품 수수 사건, 국민의힘 공천 개입 사건 세가지뿐입니다. 특검은 구속으로 신병을 확보한 뒤 추가 수사를 통해 삼부토건 주가 조작,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등 특검법에 명시된 대부분의 범죄 혐의를 기소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2017년부터 서울중앙지검장의 배우자, 검찰총장의 배우자, 대통령의 배우자로서 김건희 여사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온통 특권과 반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남편이 가진 공적 권력을 이용해 흡혈귀처럼 지속해서 사적 이익을 취한 것입니다. 김건희 여사의 이런 행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중범죄입니다.
정부 수립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모두 배우자, 자식, 측근들의 부패와 비리로 국민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불행한 역사를 모를 리 없는 김건희 여사가 이런 범죄를 저지른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습니다. 혹시 처음부터 돈을 벌기 위해 남편을 검찰총장이나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자신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확신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무척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 모든 권력형 범죄와 비리의 책임을 김건희 여사 한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 온당할까요? 김건희라는 ‘악마’가 이 모든 범죄를 혼자 기획하고 실행한 것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건희 여사가 공사의 구분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영부인이 되기 전부터 우리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선언한 2021년 6월29일 이후 학력 부풀리기와 도이치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 등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온갖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김건희 여사는 2021년 12월26일 국민의힘 당사에서 눈물을 흘리며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국민의 눈높이에 어긋나지 않도록 조심 더 조심하겠다. 많이 부족했다. 앞으로 남은 선거 기간 동안 조용히 반성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겠다. 그리고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

기자회견을 지켜본 국민 대다수가 김건희 여사의 사과는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투표자의 48.56%는 윤석열 후보를 찍었습니다. 김건희 여사가 영부인이 되면 온갖 사고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미필적 고의’로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혹시 진짜로 김건희 여사가 그럴 줄 몰랐다고 믿은 사람이 있었다면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실 참모진과 행정부 고위직, 공기업체 등에 자신의 검찰 인맥과 충암고 인맥을 깔았습니다. 윤석열 부부의 거주지였던 ‘아크로비스타’ 인맥과 김건희 여사의 사업체인 ‘코바나콘텐츠’ 인맥도 여기저기 약진했습니다. 아크로비스타보다는 코바나콘텐츠 인맥이 더 막강했습니다. 김건희 여사에게 줄을 대서 장관 자리를 차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통령실 모든 비서관실에는 김건희 여사와 가까운 행정관들이 한두명 꼭 있었습니다. 비서관과 행정관들은 이들의 눈치를 심하게 봤습니다. 대통령실 사람들은 윤석열 대통령을 ‘브이 원’(V1), 김건희 여사를 ‘브이 제로’(V0)라고 불렀습니다.
국민의힘도 그랬습니다. 2022년 6월1일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그리고 2024년 4·10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의힘 사람들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에 줄을 대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줄 대기에 성공한 사람 중 상당수가 공천을 받았습니다. 특검 수사 대상에 오른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해서 행정부 고위직, 대통령실 참모진, 국민의힘 정치인들까지 김건희 여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특권과 반칙의 고리에 단단히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이후에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4월4일 윤석열 대통령 파면 직후 국민의힘 비례대표 의원 한 사람이 기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계엄령이 계몽령이라고 한 친윤계 모 중진 의원이 김건희 여사한테 ‘경국지색’이라고 앞에서 말했단다. 그걸 듣고 여사는 좋아하고. 지적 수준이 그 정도인 사람들이다.”
어떻습니까? 김건희 여사한테 경국지색이라고 한 국회의원이나 그 말을 듣고 좋아한 김건희 여사나 참 기가 막히는 사람들입니다.
김건희 여사에 줄을 대서 출세하고 민원을 해결하고 돈을 번 사람들은 김건희 여사와 함께 범죄를 저지른 공범들입니다. 철저히 수사해서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김건희 여사와 관계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괜찮은 것일까요? 우리 중에 특권과 반칙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통 신호 위반이나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입건이라도 되면 경찰에 힘써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입사나 승진을 위해, 계약을 따내기 위해 이리저리 연줄을 찾아 나서는 것이 현실입니다.
김건희 여사는 어쩌면 여전히 특권과 반칙이 통용되는 우리 사회의 부패 구조를 극단적으로 상징하는 그런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김건희 여사와 공범들이 바로 우리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와중에 민주당 4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과 국정기획위원회 경제2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이춘석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인공지능 관련 주식을 차명으로 거래하다가 들켰습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헌법은 국회의원에게 청렴의 의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지위를 남용하여 재산 상의 권리·이익 또는 직위를 취득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국회법에는 국회의원이 “국가 이익을 우선으로 하여 직무를 수행한다”고 선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춘석 의원의 행위는 범죄 이전에 헌법 위반이요, 국민에 대한 배신입니다. 국회에서 제명하고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회의원으로서 얻은 정보를 이용해 주식 투자를 한 사람이 이춘석 의원뿐일까요? 다른 의원들은 또 없을까요? 이번 기회에 의원들의 직위를 이용한 주식 거래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수조사든 뭐든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를 향해 한 발짝 나아 가야 합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는 노무현 대통령의 꿈이었지만 그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는 우리가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 특권과 반칙이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도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립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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