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52> 환관고(宦官考)] 환관 발호의 역사에 오늘날 현실을 비추어본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진중음(秦中吟)’ 10수는 세상을 풍자적으로 노래한 대표적인 사회시다. 당(唐) 중기 사회의 여러 불합리와 부조리를 꼬집고, 민간의 아픔을 달래고 있다. 가혹한 세제(稅制)의 폐단을 들춰내기도 하고, 귀족의 사치를 나무라거나 늙어서도 물러날 줄 모르는 노욕(老慾)의 고관을 비꼬기도 한다.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경비(輕肥)’는 당시 권세를 떨치던 환관(宦官)의 교만한 태도와 사치스러운 생활을 질타하고 있다.
“마음과 기세의 교만함이 온 거리를 채우고, 안장과 말 장식은 빛나서 먼지를 비춘다. 저 사람이 누군가 물으니, 남들이 궁중 내신이라고 말한다. 주홍색 관복 입은 자는 온통 대부이고, 자줏빛 관인 띠를 찬 자 중에는 장군도 있다. 군중 연회에 간다고 자랑하면서, 구름처럼 말을 달려서 가는구나. 술잔에는 아홉 번 빚은 값진 술이 넘치고, 상 위에는 사방팔방의 산해진미가 널려 있다. 과일 중에서는 동정산의 귤을 쪼개고, 회로는 천지의 물고기를 썰어 낸다. 배불리 먹어 마음 느긋해지니, 거나하게 술 취해 기세 더욱 떨친다. 이 해는 강남에 가뭄이 들어, 구주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다 하네(意氣驕滿路, 鞍馬光照塵. 借問何爲者, 人稱是內臣. 朱紱皆大夫, 紫綬或將軍. 誇赴軍中宴, 走馬去如雲. 尊罍溢九醞, 水陸羅八珍. 果擘洞庭橘, 膾切天池鱗. 食飽心自若, 酒酣氣益振. 是歲江南旱, 衢州人食人).” 경비는 ‘가벼운 갓옷과 살진 말’을 뜻하는 ‘경구비마(輕裘肥馬)’의 줄임말로, 부유한 사람이 외출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논어(論語)’에서 비롯됐다.
당은 중기 이후에 환관의 세력이 극성했다. 개국 초기 태종(太宗)은 환관이 4품 이상 오르지 못하도록 엄격히 금했지만, 현종(玄宗) 때부터 문란해져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력사(高力士)는 만년의 현종에게 큰 신임을 얻어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정책 결정은 물론 재상과 장군의 인사도 황제와 함께 의논했다. 이에 고관대작도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그 뒤로도 이보국(李輔國)을 비롯해서 정원진(程元振), 왕수징(王守澄), 구사량(仇士良), 전령자(田令孜)로 이어지는 환관의 전횡(專橫)이 계속됐다. 급기야 군권까지 장악한 그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황제를 끌어내리기도 했다. 환관이 옹립한 황제만 여섯이나 됐다. 양복공(楊復恭)은 스스로 ‘정책국로(定策國老)’라고 칭하기도 했다. ‘정책을 정하는 나라의 원로’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들의 권세도 결국 종말을 맞았다. 당 말기 가장 강력한 군벌이던 주전충(朱全忠)이 군대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와 환관 수백 명을 도륙한 것이다. 황제의 시중을 위해 품계가 낮고 나이가 어린 30명만 살려두었다.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환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서두에 등장하는 ‘십상시(十常侍)’다. ‘상시’는 진(秦)나라 때 설치된 ‘중상시(中常侍)’를 가리킨다. 후한 이전에는 문사가 담당했지만, 후한에 와서는 환관으로 충당했다. 십상시라는 호칭은 ‘후한서(後漢書)’의 ‘환자열전(宦者列傳)’에 처음 등장한다. 영제(靈帝) 때 궁중에서 작당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장양(張讓)과 조충(趙忠) 등 12명의 중상시를 낭중(郎中) 장균(張鈞)이 상소문에서 이렇게 통칭했다.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장균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십상시의 온갖 악행에서 비롯된 사태이므로 그들을 참수해 백성의 원한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제는 “이 자가 정말 미친놈이구나(此眞狂子也)”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균은 다시 같은 취지의 글을 올렸지만, 십상시의 모함으로 끝내 붙잡혀 옥사하고 말았다. 그 뒤 황제가 죽자, 원소(袁紹)가 대장군 하진(何進)에게 환관 척결을 건의했지만 일이 발각돼 하진이 화를 당했다. 이에 원소가 군대를 이끌고, 궁으로 쳐들어가 환관을 보이는 대로 주살했다. 장양 등 수십 명이 어린 황제를 데리고 궁을 빠져나갔으나, 쫓기다가 모두 황하에 몸을 던졌다.
전한은 외척이 득세한 데 반해 후한은 환관이 위세를 떨치던 시대이다 보니 사대부와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십상시 이전의 대표적인 사건은 두 차례에 걸친 ‘당고(黨錮)의 화(禍)’다. 166년 이응(李膺)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 측 관료가 태학생과 연합해 환관이 활개 치는 조정을 비판하자, 환관 쪽에서 황제를 등에 업고 탄압에 나섰다. 사대부가 당을 만들어(結黨) 조정에 반기를 들었으므로 종신토록 관직에 나아갈 수 없도록 금고(禁錮)의 벌을 가한다는 명분이었다. 이응을 포함해 200여 명이 체포돼 고초를 당하다가 풀려났다. 169년에는 태부(太傅) 진번(陳蕃)과 대장군 두무(竇武)가 환관을 토벌하려다 도리어 화를 당했다. 이를 빌미로 후람(侯覽)과 조절(曹節)이 이끄는 환관 무리가 농간을 부려 이응과 범방(范滂) 등 100여 명을 하옥한 뒤 처형했다. 그 뒤에도 수백 명이 화를 당하거나 구금됐다.
그에 앞서 159년에는 대장군 양기(梁冀)가 환관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양기는 외척으로서, 20년 가까이 권력을 농단하며 ‘발호장군(跋扈將軍)’으로 불렸다. 불만을 품은 황제가 단초(單超) 등 5명의 환관과 모의한 뒤 군대를 끌어들여 양기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다. 그 공으로 다섯은 모두 열후에 봉해졌다. 황제의 신임을 믿고 교만해진 그들은 양기 못지않게 발호했다. 후한의 환관 전성시대는 이렇게 시작됐다.
잘 알려진 것처럼 조조(曹操)도 환관 가문 출신이다. 그의 생부 조숭(曹嵩)이 환관 조등(曹騰)의 양자였다. 조등은 황제를 잘 보필한 공으로 비정후(費亭侯)에 봉해지기도 했다. 조조는 환관의 후손으로서 조정 권력을 독단하고 그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을 멸망시키도록 기반을 다졌다. 남송 후기의 시인 유극장(劉克莊)은 이와 관련해 이렇게 풍자했다. “비정후가 살아 있던 날, 난은 이미 싹이 터 있었다. 명령의 종자를 길러서도, 한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었으니(費亭侯在日, 亂已有萌芽. 養得螟蛉種, 猶能覆漢家).” 모두 100수로 된 ‘잡영(雜詠)’ 중 ‘조등(曹騰)’이란 작품이다. ‘명령(螟蛉)’은 ‘시경’의 ‘소완(小宛)’ 편에 보이는 “명령유자, 과라부지(螟蛉有子, 蜾蠃負之)”라는 구절에서 왔다. 나방이 알을 낳으면 나나니벌이 업고 간다는 말이다. 양자(養子)를 ‘명령지자(螟蛉之子)’라고 하는 연유다.
명(明) 때도 환관의 폐해가 심했다. 초기에는 왕진(王振)이, 중기에는 유근(劉瑾)이, 후기에는 위충현(魏忠賢)이 각각 맹위를 떨쳤다. 과거에 낙방한 왕진은 ‘자궁(自宮·스스로 거세함)’한 다음 제 발로 대궐에 들어갔고, 위충현은 시정의 무뢰배로서 도박을 일삼다가 역시 스스로 환관이 됐다고 전해진다. 유근은 그 권세가 황제에 버금가 서 있는 황제라는 뜻의 ‘참황제(站皇帝)’나 ‘입황제(立皇帝)’ 란 별명을 얻었다. 위충현 역시 ‘만세(萬歲)’ 의 황제보다 약간 낮은 ‘구천세(九千歲)’로 불렸다. 그러나 그들의 말로는 비참했다. 왕진은 난군 속에서 죽었고, 유근은 능지처참당했다. 위충현 역시 궁지에 몰린 끝에 목을 매어 자결했다.
중국 역사에서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환관은 수조(豎刁)라는 사람이다. 춘추시대 제 환공(齊桓公)의 신하이던 그는 군주의 신임과 총애를 얻기 위해 스스로 거세했다고 ‘관자(管子)’와 ‘한비자(韓非子)’가 전한다. 재상이던 관중(管仲)이 죽기 전 수조는 자궁까지 한 독한 사람이니 멀리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환공은 듣지 않고 가까이 두었다. 결국 뒷날 병들어 누운 환공은 수조가 음식을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
역사에서 환관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됐다. 하지만 일부 긍정적인 인물도 있다. 종이를 발명했다고 알려진 후한의 채륜(蔡倫),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해외 항로를 개척한 명나라 초의 정화(鄭和)가 대표적 예로 꼽힌다.
‘시경’에도 환관을 언급한 부분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소아(小雅)’의 ‘항백(巷伯)’편 마지막에 있는 “사인 맹자가 이 시를 지었다(寺人孟子, 作爲此詩)”라는 구절이다. ‘사인(寺人)’은 시자(侍者)의 뜻으로, 내시를 가리킨다. 그러나 고대의 내시나 환관이 반드시 거세된 남성에게만 맡겨지던 직책은 아니었다. ‘후한서’의 ‘환자열전’ 서문에는 “후한 초부터 환관은 모두 엄인을 채용하고 다시는 다른 사람을 섞어 넣지 않았다(中興之初, 宦官悉用閹人, 不復雜調他士)”라는 기록이 있다. ‘엄(閹)’은 거세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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