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은 어떻게 철학이 되는가 [.txt]
화산 지형에서 ‘다공성’ 핵심개념 발견
풍경이 사유를 낳는 과정 촘촘히 분석

1920년대 중반은, 누군가의 말처럼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선 시기였다. 레닌이 세상을 떠났고, 닐스 보어는 물리학의 기초를 뒤흔드는 질문을 던졌으며,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출간했고, 채플린은 영화 ‘황금광 시대’를 찍었다. 격동하는 시대의 경계선 위에서, 장차 유럽 지성사를 이끌게 될 젊은 지식인들이 나폴리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는 테오도어 아도르노, 발터 베냐민,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 에른스트 블로흐 등 훗날 ‘비판이론’으로 불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인물들이 있었다.
‘나폴리 1925’는 이들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폴리를 둘러싼 화산 지형이 어떻게 비판이론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하고 그 형식을 구조화하는 데 기여했는지를 탐색한다. 햇살에 반짝이는 짙푸른 바다, 구멍이 촘촘히 뚫린 화산석,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분화구…. 나폴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들이 비판이론의 핵심 개념들로 승화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쾰른대학교 독문학연구소 명예교수다.
당시 나폴리는 유럽에서도 풍광이 좋기로 유명한 인기 여행지였다. 살아 있는 화산인 베수비오산의 장엄함, 그림엽서 같은 카프리섬, 소렌토에서 포시타노와 아말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22살의 음악학도였던 아도르노는 1925년 9월,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차이퉁’ 편집자인 크라카우어와 함께 3주간의 나폴리 여행길에 올랐다. 14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우정 어린 친구 사이였다. 여행 막바지에 이들은 베냐민과 조우했고, ‘철학적 전투’라 불린 열띤 논쟁을 벌였다.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베냐민은 박사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완성하기 위한 자료 뭉치를 들고 카프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아샤 라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함께 폼페이 등을 여행한 뒤 ‘나폴리’라는 에세이를 집필했다.
나폴리는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 자리한 도시다. 이곳에서는 화산암이 건축 자재로 널리 사용되었고, 베냐민은 이 화산석에서 영감을 받아 비판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다공성’(porosity)을 개념화했다. 다공성이란 고체 내부에 빈틈이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나폴리 건축과 문화, 공동체의 유기성과 유동성을 포착했다. 사람들은 발코니에서 거리의 행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안뜰은 공동체가 모이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안과 밖,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의 경계가 모호한 도시였다.
베냐민은 이 다공성에서 현대 산업 자본주의의 경직되고 구획화된 구조에 대한 ‘저항의 은유’를 발견했다. 획일적이고 비인간적인 삶의 양식을 비판한 프랑크푸르트학파에게 ‘다공성’은 혼종적이고 유기적인 삶의 가능성이자 대안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개념이었다. 기계처럼 살아가지 않고, 틈과 여백 속에서 삶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바로 그들이 포착한 다공성의 본질이었다.

저자는 베냐민의 문체적 개방성과 비체계성 또한 나폴리 화산석의 다공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다윈이 진화론의 지나친 질서정연성을 피하기 위해 산호초를 구조적 모델로 삼았듯, 베냐민은 나폴리의 화산석을 철학적 사유의 지반으로 삼은 것이다.
아도르노는 나폴리 여행 직후 다공성 개념을 도입한 음악평론을 썼고, 블로흐는 “다공성의 반대는 부르주아 문화”라고 말했다.
다공성을 보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으로 확장시킨 개념이 ‘성좌’(constellation)다. 다공성이 공간이나 사회 구조의 유연성을 뜻한다면, 성좌는 인식과 사유의 비선형적 구조, 즉 사물 간의 긴장과 연결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아도르노는 “사물의 진리는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배열될 때 드러난다”고 믿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성좌적 사고였다. 사물은 고정된 개념으로는 포착되지 않지만, 성좌처럼 배열될 때 그 관계 속에서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폴리 1925’는 풍경이 어떻게 철학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하나의 풍광이 어떻게 철학적 기획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풍경이 예술로 승화되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고흐는 프랑스 아를에 정착해 명작을 남겼고, 헤밍웨이는 쿠바 아바나가 아니었다면 ‘노인과 바다’를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예술적 전환이 철학적 사유에서도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한다. 나폴리의 바다와 분화구에서 길어 올린 ‘다공성’과 ‘성좌’는 현대 사회를 분석하는 개념적 도구이자 진리의 형식으로 재구성된다. 그리하여 이들의 나폴리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지성사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풍경이 사유를 낳고, 사유는 다시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가 된다는 걸 소명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이례적이고 독창적인 저작이다.
책은 이같은 통찰을 입증하기 위해 아도르노와 베냐민의 메모, 편지, 일기, 대화 기록 등을 촘촘히 분석한다. 다만, 이들이 나폴리와 관련해 남긴 기록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저자의 추측과 추론으로 메워진 부분도 많다. 하지만 오히려 이 과정은 학문적 상상력의 힘이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한다.
또한 이들의 사적 기록들은 지적 거장들의 우정과 교류, 질투와 경쟁을 엿보는 재미도 선사한다. 자신의 천재성을 자만하는 아도르노, 예민하고 까다로운 베냐민의 인간적인 면모도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난해한 철학적 개념을 다루다 보니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흥미진진하게 책장을 넘기게 되는 이유는 ‘읽는 맛’이 쏠쏠한 번역 덕분이다. 원작의 리듬과 감각을 최대한 살린 번역은 나폴리의 바람과 냄새까지 느껴지게 만든다. 철학책이지만 다 읽고 나면 당장 짐을 싸서 나폴리로 떠나고 싶은 충동을 자극한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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