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앤서 맨이 있는 곳
그의 대답 그대로 실현되지만
일어나는 과정은 뜻밖의 여정
앤서 맨은 항상 우리 마음 속에
스티븐 킹 ‘앤서 맨’(‘더 어두운 걸 좋아하십니까’(하권)에 수록, 이은선 옮김, 황금가지)

그날 필이 한 질문에 앤서 맨의 대답은 거의 “네”였다. 전쟁이 벌어지고 자신이 참전하느냐는 질문에도 “네”. 부상당하느냐는 대답에는 “아니요”. 그 질문엔 구멍이 있는 듯해서 다시 물었다. 자신이 전사하느냐고. 앤서 맨은 대답했다. 그렇지 않다고. 스톱워치가 멈추고, 필의 눈앞은 회색으로 덮이며 정신을 잃었다. 그 후 필의 삶은 앤서 맨이 대답한 대로 이루어졌다. 결혼생활도 행복했고 변호사 사무실도 자리 잡아가고 베트남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 아들을 얻은 게 가장 행복한 일이었다. 야구를 잘하고 아빠를 무척 좋아했던.
삶의 기반을 다진 서른아홉의 필은 두 번째로 앤서 맨의 표지판을 보게 되었다. 처음 만난 지 14년 후였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이런 마음이 강렬하게 일지 모른다. 그냥 가라고, 앤서 맨에게 자식에 관한 일만은 묻지 말라고. 그러면서도 필처럼 도저히 그 부분을 지나쳐버릴 수 없고, 앞으로 그들이 나눌 질문과 대답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장을 붙들게 될지 모른다. 필은 자신이 “대답을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질문을 내뱉고 말았다. “우리 아들은 프로야구 선수가 될까요?” “아뇨”. 아들의 미래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대답은 모두 아니요.
앤서 맨이 등장한 후로 주인공인 필도 독자도 그가 했던 대답이 모두 실현이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이제 이야기는 앤서 맨의 대답대로 흘러가지만 그 일이 일어나는 과정은 뜻밖이다. 어느덧 소중했던 존재들을 잃은 필은 우울과 분노에 사로잡힌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내 인생이 왜 이래야 하는 걸까. 그런 필에게 승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의뢰인이 방문하면서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 ‘앤서 맨’은 스티븐 킹의 최고 단편으로 손꼽힌다는데, 무엇보다 생의 아이러니와 딜레마 상황을 이렇게 흥미롭게 그릴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소설이 끝나면 상상하게 된다. 만약 앤서 맨을 만나면 어떤 질문을 하고 싶을까? 제가 좋은 소설을 쓰게 될까요? 부모가 돌아가시기 전에 좀 나은 데로 이사 갈 수 있을까요? 만약 앤서 맨이 아니요, 라고 대답하면? 소설 쓰길 그만둘 건가, 아니면 이 부족한 집에서 부모와 살기를 그만둘 건가. 모두 아니다. 좋은 소설을 쓰든 그렇지 않든 계속 쓰고 여전히 하루하루 부대끼며 부모와 살아가겠지. 그렇다면 이 질문들은 필이 앤서 맨을 두 번째 만났을 때 느낀 ‘대답을 듣고 싶지’ 않거나 듣지 않아도 되는 질문에 속할 것이다. 죽음을 앞둔 필이 마지막으로 앤서 맨을 만나는 걸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앤서 맨은 항상 우리 마음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긍정적일 때는 네, 부정적이고 자존감을 잃었을 때는 모든 질문에 아니요, 라고 대답하는. 지금 내 마음엔 어떤 앤서 맨이 자리 잡고 있는지.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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