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로운 시골 떠나 '어쩌다 떠난 프랑스'

김윤지 하동군청 근무 2025. 8. 7.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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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너리댁의 밥상> 프랑스 샤모니에서 보내는 편지
안시 호수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유람선을 타는 것이다. 저 멀리 유람선이 보인다. /김윤지

#권태로운 시골 떠나 '어쩌다 피서'

한여름을 네 조각으로 나눈다면, 지금은 세 번째 조각쯤이겠지요. 저는 늘 마지막 조각을 애틋하게 바라보다가도, 손에 쥐고 있는 조각을 더 아끼지 못한 걸, 후회하곤 합니다. 물론 여름이라는 계절은 그림자가 길어, 끝날 듯 끝나지 않을 걸 잘 알지만요. 그래서 이번에는, 지금 이 세 번째 조각을 조금이라도 덜 아쉽게 보내보자는 마음으로 이역만리 먼 곳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 예상과는 달리, 이곳은 생각보다 꽤 쌀쌀합니다. 온전한 여름을 즐기러 온 줄 알았는데, 어쩌다 보니 피서를 오게 된 셈이네요. 날씨 어플이 알려주던 스위스 기온을 보며, 속는 셈치고 넣은 바람막이가 없었다면 온종일 소름을 오소소 달고 다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서늘한 여름은 처음인지라, 이걸 정말 여름이라 불러도 되는 건지 어색할 따름입니다.

가끔 옆방에서 들려오는 나무 의자 끄는 소리나 시장에 모인 사람들의 대화에 섞인 프랑스어가 배경 음악처럼 들려옵니다. 틈틈이 프랑스어를 공부하긴 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말을 빨리하는지, '몽블랑'이라는 단어 빼고는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 안시 마켓에서 찾은 납작복숭아. /김윤지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지역의 복숭아가 유난히 맛있다는 사실인데요. 종류도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꾹 눌린 모양의 납작 복숭아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마치 적혈구처럼 생긴 이 복숭아는 손바닥 위에 착 붙는 감촉부터가 싱그럽습니다. 한입 베어 물고 코로 숨을 훙 내쉬면, 향긋한 금목서 향에 달콤함이 더해진 복숭아 향이 코끝에 맴돕니다. 뽀득, 껍질을 깨물면 과육이 조심스레 터지고, 입안에 퍼지는 촉감과 향이 제 주변을 맴도는 기분이 듭니다.

그렇기에 매일 시장에서 몇 개씩 사서 가방에 넣고, 공원 벤치에 앉아 하나씩 꺼내 먹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과즙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온전히 맛에 정신이 팔립니다. 하지만, 하나를 뚝딱 먹고 나면 손가락 사이사이에 남은 끈적함이 문득 거슬립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끈적함이 문득 할머니를 떠올리게 합니다.

복숭아는 우리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입니다. 지금 제가 맛보는 이 납작 복숭아의 진한 풍미를, 할머니는 아마 평생 모르고 지내실 테지요. 그 사실이 괜히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잠깐, 정말 아주 잠깐, 복숭아 몇 알쯤 몰래 가져갈 수는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벌금을 내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생각보다 금액이 꽤 커서 결국 포기했지요. 대신 저는 다짐했습니다. 지금 이 낯선 땅에서의 1/4 조각을 더 뜨겁게, 더 또렷하게 느껴보려 합니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이곳의 느낌과 향을 최대한 전달해드리며 할머니와 함께 올해 한여름의 마지막 조각을 보내기로요. 그렇게 여름의 네 조각을 모두 꾹꾹 눌러 음미하고 나면, 올해 여름은 생각보다 아쉬움이 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호수와 운하의 도시 안시는 프랑스인이 노년에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로 꼽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사람들이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있다. /김윤지

그러니까 피서라는 건 결국, 잠시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그리워하던 시절로 도피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지금 이 자리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겠지요. 저도 할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다 편하지만은 않으니 말입니다.

지금 이 셋째 조각을 충분히 음미하고 나면, 마지막 조각은 기쁜 마음으로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지금을 꾹꾹 눌러 삼키고 나면, 올해 여름은 꽤 진심이었노라고, 나중에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그 다음엔 제 1/4 조각인 할머니 품으로 돌아가, 딱 맞는 자리를 찾은 듯한 안정감을 느끼겠지요.

선생님들의 피서는 어떤 향이었나요?

 
/김윤지 하동군청 근무

※ 필자소개 (얼떨결에 담담하고 소박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지만 속은 아주 기름지답니다. 간혹 글에 누런 기름이 뜨더라도 페이퍼타월처럼 저를 감싸주시고 닦아주시길 바랍니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