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나는 기술은 나라 구할 무기"… 항공 자립 꿈꾼 '공군 아버지' 최용덕

김경준 2025. 8. 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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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방-방산
15세에 중국 망명해… 전투기 조종사로 일본 맞서
'나의 운동 목표'서 "우리 손으로 항공기 만들어야"
광복군 항공대 창설 건의… 6·25 땐 '부활호' 제작
1953년 10월 28일 최용덕(가운데) 장군이 공군력 강화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고 있다. 공군 제공
"주석님, 지금 광복군은 비행기 한 대도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갖지 못하는 한, 이 싸움은 이길 수 없습니다."

김구 주석이 이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중일전쟁의 여파로 1940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전시 수도인 충칭으로 거점을 옮긴 터였다. 충칭 임정은 한국광복군을 창설, 중국 정부와 협력해 본격적인 군사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설 초기 광복군의 전투력은 보잘 것 없었다. 1940년 간부 30명으로 창설해 1942년 무렵 1,000명 수준으로 늘어난 게 고작이었다. 무기도 중국과 연합군으로부터 지원받거나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소총, 기관총, 박격포 등이 다였다. 자금이 턱없이 부족한 광복군에 비행기, 차량, 전차 등은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이런 와중에 최용덕(1898~1969) 광복군 참모처장은 김 주석에게 항공대 창설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당장 중국과 미국에서 교육 받은 조종사만 몇 명 있을 뿐 비행기조차 없었다. 15세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 중국군 전투기 조종사로서 일본에 맞섰던 그는, 공군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1940년대 초 일본은 항공기 4,000여 기, 병력 약 11만 명의 아시아 최강 공군력(육·해군 항공대)을 보유하고 있었다.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공중 정찰과 폭격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임정에서도 광복군 창설 이전부터 항공 전력 확보 의지가 없진 않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20년 임정과 국내 조직 간 비밀 연락수단 등으로 활용하고자 항공기 구입을 추진했다. 그러나 전투기나 폭격기는커녕 연락기조차도 일본의 방해 공작과 자금난에 막혀 구하지 못했다.

1920~30년대 중국 항공대 전투기 조종사로 활동하던 최용덕 장군. 공군 제공

다만 임정의 조종사 양성 노력은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윌로스 비행학교를 설립해 항공 독립의 초석을 다졌고, 중국 비행학교에 위탁 교육을 보내는 등 조종사 양성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 주석은 최용덕을 비롯한 항공 선각자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군 건설계획인 '공군설계위원회'를 설치하고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을 수립했다. 이때 최용덕은 실질적 총책임자를 맡아 공군 창설 준비를 주도했다. 그러나 임정의 공군 창설은 비행기를 확보할 도리가 없어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하늘과 땅의 차이'를 경험한 최용덕의 포부는 단순히 조종사를 키워내고 항공기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젊은 시절에 쓴 '나의 운동 목표'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 손으로 설계 제작한 항공기가 우리 공역에서 날아야겠다. 인류의 행복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다른 나라 공역에서도 날아야겠다."

그는 비행기도 조종사도 없던 그 시절부터 온전한 항공 자립을 꿈꾼 것이었다. 단순히 비행기를 얻어오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드는 조국을 꿈꿨고, 나아가 다른 국가들과 연합작전이 가능한 전력을 갖추길 바랐다. 그는 회고록에서도 "하늘을 나는 기술은 단순한 운송 수단이 아니라, 나라를 구할 무기"라고 강조했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대한민국은 그토록 염원했던 광복을 맞았다. 광복 이듬해 기나긴 중국 생활을 마치고 조국에 돌아온 그는 항공건설협회를 설립해 제대로 된 공군 창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번엔 미군정이 발목을 잡았다. 중국에서 훈련받은 지휘부의 경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서 이등병부터 다시 미국식 군사훈련을 받으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기가 찰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옛날 이순신 장군도 조국을 위해 백의종군했듯이 대의를 위해 우리가 감내하자"며 다른 간부들을 설득했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는 그의 발걸음은 더딜지언정 멈추지 않았다.

1953년 제작된 최초의 국산 비행기인 부활호가 2004년 창고에서 발견됐다. 7년에 걸쳐 개량 복원된 부활호가 2011년 7월 14일 경남 사천 공군 제3훈련비행단에서 열린 복원 기념식에서 날아오르고 있다. 공군 제공

1948년 5월 드디어 육군항공대가 창설됐다.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2인승 L-4 연락기 10대가 대한민국 항공 전력의 시작이었다. L-4에는 무장을 달 수 없었기 때문에 공중에서 부조종사가 직접 수류탄을 던져야 했다. 최용덕은 육군항공대 소위로 임관해 같은 해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드디어 1949년 육군항공대에서 진화한 육군항공기지사령부는 공군으로 독립하게 된다.

그는 1950년 공군으로 복귀한 뒤 6·25 전쟁을 치렀다. 전쟁 초기 공군사관학교장을 맡아 조종사 양성에 힘썼고, 1952년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한 뒤 '우리 손으로 만든 항공기'에 대한 꿈을 끝내 이뤄냈다. 그는 "우리들의 하늘을 우리들의 비행기로서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통하고 부끄러운 일인가"라며 항공창을 설립했고, 1953년 대한민국이 스스로 만든 최초의 비행기 '부활호'를 탄생시켰다. 오늘날 '공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다. 그는 1969년 8월 15일 광복절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픽=박종범 기자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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