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괴생명체 '아가몬'…90년대생 '혼종의 세계관' 모성을 깨우다
추수 <아가몬 대백과 : 외부 유출본>
예술과 기술, 공간의 경계 넘나드는 미술 프로젝트
LG전자와 국립현대미술관 중장기 파트너십 첫 작품
92년생 추수(TZUSOO) 작가의 설치와 미디어 신작
생명-욕망-순환의 감각적 세계, 내년 2월 1일까지
1970년대 화력발전소를 개조한 런던 테이트모던은 현대미술의 메카다. 이곳의 얼굴은 터빈홀(Turbine Hall). 높이 약 35m, 길이 155m, 폭 22m로 총면적 3300㎡(약 1000평) 의 거대한 공간엔 매년 동시대가 가장 주목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펼쳐진다. 25년간 1년에 단 1명의 작가에게 전시 기회가 주어져, 전 세계 예술가들에겐 마음껏 창작 실험을 할 수 있는 '꿈의 캔버스'가 됐다.

경복궁 옆 인왕산을 배경으로 옛 국군 기무사 자리의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도 이런 공간이 있다. 높이 17m, 면적 430㎡의 공간에 자연광을 끌어들인 '서울박스'다. 7개의 전시실을 잇는 중심이기도 한 이곳은 그 동안 주요 전시의 일부이거나 각 전시의 입구로서만 역할을 해왔다.
88개 LG OLED 스크린, 살의 정령들이 춤춘다
이달부터 '서울박스'는 단독 전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MMCA가 LG전자와 중장기 파트너십을 맺은 첫 전시 '추수-아가몬 대백과: 외부유출본'이 지난 1일 개막하면서다. 첫 선정 작가부터 파격적이다. 1992년생 예술가 추수(TZUSOO·본명 이한결)는 생명, 욕망, 순환의 감각적 세계를 과감하게 펼쳐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이래 단독 전시로는 최연소 작가다.

서울박스 한 가운데에는 살점을 뭉친듯 보이는 존재가 몸에서 푸른 이끼를 휘감고 있다. 매끈하고 반짝이는 피부 위로 한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물. 해조류인 우뭇가사리로 만든 이 오브제의 이름이 ‘아가몬’이다. 실제 적절한 물과 햇빛이 없으면 금세 말라 죽을 수 있고, 시간이 갈수록 늙어간다는 점에서 갓 태어난 생명체를 닮았다. 물이 흐르는 지름 4.5m의 철판과 3m 높이의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물은 마치 자궁 속 양수와 탯줄을 연상시킨다.


‘아가몬 인큐베이터 5’라는 이름의 설치 작업을 둘러싼 건 55인치 LG OLED 스크린으로 구성된 두 개의 초대형 월이다. 총 88개의 스크린이 44개씩 마주보고 있는데, 각각 ‘태(兌)’와 ‘간(艮)’의 정령이 헤엄치듯 활보한다. ‘살의 여덟 정령’이라는 이름의 미디어 작업은 무질서하게 흩어진듯 보이면서도 서로 충돌하고 교차하며 생생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대체 이것들은 다 무엇일까.
두 개의 꿈 사이에서 태어난 ‘아가몬’
추수 작가는 어릴 적부터 ‘작가’와 ‘엄마’가 꿈이었다. 2019년 디지털 현실에 자신의 아기를 잉태하는 작업 ‘슈뢰딩거의 베이비’를 발표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작가는 예술가로서의 삶과 엄마가 되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다 디지털 세계에서 아이를 낳아 돌보는 방식으로 모성을 충족해왔다. ‘아가몬’은 작가 자신의 아기인 셈이다.

그는 전통적 출산의 개념이 완전히 달라진 현대사회에서 ‘모성’과 ‘성적 욕망’을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추수 작가는 “모든 사람이 엄마의 희생과 돌봄을 통해 성장해 왔는데, 그 과정을 터부시 하거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또 “미디어 작업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나이는 서른을 넘었고, 몸은 굉장히 망가져 제대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게 된 게 아가몬의 시작이었다”고 덧붙였다.
아가몬이란 이름은 ‘아기’의 상징적 의미다. 우뭇가사리의 독일어인 ‘아가(argar)’ 발음에서 차용했다. 디지털 세계에서 시작됐지만, 서른 살을 넘긴 이후부턴 손으로 생명체와 같은 무언가를 만들어 직접 돌보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고. 여러 재료를 실험하다 실제 사람의 피부와 가장 유사한 질감을 가진 우뭇가사리를 택했다.

“6개월간 미술관에서 공동육아”
‘아가몬 대백과: 외부 유출본’이라는 전시명은 미완결된 상태의 변화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후 작품 세계가 더 크게 확장될 것이라는 얘기다. 관람객들은 앞으로 6개월간 ‘아가몬’의 성장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된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프로젝트의 첫 선정작가 추수의 다채로운 실험정신은 MMCA x LG OLED 시리즈가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창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며 “기술과 예술이 교차하는 이 전시가 동시대 미술의 확장과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추수 작가는?
1992년 서울 출생. 홍익대 판화과와 예술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슈투트가르트 조형예술대학의 학석사 통합과정을 마쳤다. 독일 철학을 원전으로 읽고 싶어 독일행을 결심했다. 현재 같은 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서예가인 아버지가 ‘추수(秋水)’라는 호를 지어준 게 이름이 됐다. 게임을 좋아하다 영상, 설치, 조각, 회화를 넘나들며 작업하게 됐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감수성과 젠더 이슈, 포스트휴먼 시대의 정체성을 탐색해왔다. 대표작으로는 버추얼 아바타의 내면을 다룬 ‘에이미의 멜랑콜리’ 시리즈, AI와 작가 정체성을 엮은 ‘달리의 에이미’, 독일 내 차별적 교육 제도를 비판한 ‘나는 이곳을 졸업하는 것이 부끄럽다’ 등이 있다.
뮤직비디오 제작 스튜디오 ‘프린세스 컴퓨터’의 감독으로도 활동하며 조용필, 릴체리, SAAY 등과 협업했다. 네덜란드의 사운드 아티스트 마르텐 보스, 독립정원(이끼 예술가) 등과 함께 ‘팀 추수’를 이끌고 있다. 이번 전시에 사용된 스테인리스 파이프는 작가의 아버지가 직접 제작했다. 작가는 ‘아가몬’을 미술관에 설치하는 날, 자신의 귀에 있던 피어싱 액세서리를 꽂아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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