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지운 농민운동… 남상환·박승극의 수진농조 [일제 법정에 맞선 독립운동가·(8)]
수탈의 밑바닥에 있던 소작농
역사마저 그들 것이 아니었다
식민농업 정책, 기존 지주제 강화
친일·일본인 중심으로 생산·수탈 구조
지주, 농촌 감시·통제 말단 핵심 역할

‘독립운동’이라 하면 흔히 총을 든 의병이나 만세를 외친 학생들, 감옥에서 순국한 열사들이 떠오른다. 또 하나, 땅을 일구던 농민들도 제 몫의 싸움을 이어갔다.
1923년 전남 신안 암태도 소작쟁의는 일제강점기 농민 저항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그러나 10여 년 뒤 경기도에서도 유사한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잊혀졌다.
‘수진농민조합’(水振農民組合). 수원과 진위·서탄(현 평택시) 일대 농민들이 일제의 수탈적 농업 정책에 맞서 자발적으로 꾸린 조직이다. 이들은 소작료 인하와 타조법* 같은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고 지주와 교섭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불온한 선동’과 ‘사상범죄’로 규정했다.
조합을 이끈 이들 가운데 지금은 거의 잊힌 두 사람이 있다. 남상환(1908~1933)과 박승극(1909~?)이다. 한 사람은 무죄 판결을 앞두고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고, 다른 한 사람은 해방 후 월북한 이력으로 기억에서 지워졌다.
이들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냈고, 함께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 자체가 일제 식민 권력에겐 위협이었고, 사법 탄압의 대상이었다. 농민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연대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되던 시대였다. 경인일보 광복·창간 80주년 특별기획 취재팀은 일제의 판결문과 경찰 기록 속 흔적을 통해 그날 농민들의 외침이 ‘살기 위한 말’이었음을 다시 들여다본다. 잊힌 이름과 사건, 그 기록 뒤편의 목소리들이 우리를 1930년대 수원의 한 농촌으로 이끈다.
■ 지주 중심 농업 구조, 수탈의 시작
땅의 주인이 바뀌었다. 농민들은 여전히 논을 갈았고 똑같이 땀을 흘렸지만, 그 땅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1910~1919)으로 전국의 땅문서에 지주의 이름을 새로 새겼다. 많은 농민은 자신이 갈고 닦은 땅에서 하루아침에 소작농이 됐다.
일제의 식민 농업 정책은 자본 투자보다 기존 지주제를 강화해 일본인과 친일 조선인 지주를 중심으로 쌀을 생산·수탈하는 구조를 짰다. 이 과정에서 지주는 면사무소·경찰과 함께 농촌을 감시·통제하는 말단 식민통치의 핵심이 됐다.
192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는 ‘산미증식계획’을 앞세웠다. 쌀을 더 많이 심게 했고, 논에는 더 많은 노동과 비료가 들어갔다. 하지만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늘어난 생산물은 오로지 일본으로 수출됐다. 농민에게는 부담만 남았다.
“일제가 시키는 대로 더 심었는데, 왜 우리는 더 가난해졌을까.” 점점 줄어드는 몫, 무거워지는 삶 속 농민들 사이엔 분노와 저항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다.
고율 소작료 시달린 농민계층 울분
1930년 수원·진위 일대서 조합 결성
절박한 현실에 사회주의 마음 움직여
■ 참다 못한 농민들, 조합을 결성하다
농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 소유권이 일본인 지주에 집중되면서, 토지 없는 농민들은 고율 소작료와 고리대에 시달렸다.
1920년대 후반 이후 수원군 일대에서는 산미증식계획에 더해 대지주의 토지 병합과 고율의 지대가 겹쳐 농민들이 시름에 빠졌다. 수확 절반 이상을 떼어줘도 빚을 갚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했고, 이에 일부 지역에선 소작 거부로 맞섰다.
일제강점기 농업 구조는 양극화와 고리대 부담을 키우며 농민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결국 수원과 진위 일대 농민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을 꾸려 1930년 3월 수진농민조합(이하 수진농조)을 결성했다.
이 조합은 처음 ‘진위농민조합’으로 야막리에서 시작해 같은 해 오산으로 본부를 옮기면서 수진농조로 개칭했다. 양감·성호·북면·고덕·서탄 등 경계 지역 농민들이 중심이었다. 조합은 ‘생활 향상’ ‘문맹 퇴치’ ‘상호부조’ ‘단결’을 목표로 했다.
수진농조는 농민의 권익을 조직적으로 보호하고 지역 연대를 이뤄 전국 농민운동의 대표 모델로 평가된다.1 실제 1930년대 수원 지역 소작쟁의는 경기도에서 가장 활발했다. 이 시기 경기도 내 소작쟁의 7천72건 중 833건이 수원에서 일어났다.2
일제는 1932년 ‘조선소작조정령’을 도입해 전국 곳곳으로 번지던 소작쟁의를 제도적으로 관리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지주와 금융조합 간부가 주도하는 조정위원회를 통해 분쟁을 다뤘고, 결과는 지주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 사회주의는 왜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나
농민들의 울분, 그 밑바탕에는 단순한 절박함을 넘어 땀 흘려도 더 가난해지는 현실이 잘못됐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사회주의는 그런 물음에 대한 현실적 해답처럼 다가왔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는 식민지 민중에게 불평등한 세상을 바꿀 사상적 무기로 확산됐다. 조선의 농민들 역시 그것을 ‘계급 해방’ 같은 거창한 말보다, 자신의 억울함과 불평등을 설명해주는 언어로 받아들였다.
당시 민족주의 진영이 “나라를 되찾자”고 외쳤다면, 사회주의 진영은 “그 나라에서 누구의 삶이 바뀌어야 하는가”를 물었다. 조선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누구를 위한 독립인가’ ‘민중의 몫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 시선이 사회주의에 있었다.
그렇기에 당대 농민들에게 사회주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이자,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는 언어였고,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수진농조’ 중심 인물 남상환·박승극
조합·언론·문학 활동 아우른 지식인들
소작방식 변경 항의 ‘치안법’ 명목 체포
400일 훌쩍 넘겨 수감후 뒤늦은 무죄
■ 수진농조 활동 주도한 남상환과 박승극

수진농조의 중심 인물은 남상환과 박승극이었다. 남상환은 진위군 서정리에 거주하며 농민조합운동, 청년운동, 야학, 언론 활동을 펼친 지식인이었다. 조선일보 평택분국을 운영하며 민중과 접점을 넓혔고, 서정리 야학에서 아동을 가르치는 등 교육운동에도 힘썼다.
진위청년동맹과 소년동맹 결성을 주도하며 조직 기반을 확장한 남상환은 조합 쟁의부장으로 정남면·서탄면·갈곶리 등지 소작쟁의를 실무적으로 이끌었다. 고율 소작료나 소작권 박탈에 맞서 지주와 직접 교섭하며 조합원과 함께 해결책을 모색했다.
박승극은 수원군 양감면(현 화성시) 출신으로, 수원 청년동맹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카프) 등에서 활동한 문학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조합 창립을 주도한 그는 내부 교육, 문맹 퇴치, 정치 교양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며 농민들에게 사회주의를 알게 했고, 지역 청년단체와의 연대도 주도했다.
박승극은 수진농조가 단순한 생존권 투쟁을 넘어 계급적 연대를 지향하도록 이끌었다. 그는 각종 글과 시문을 써서 문학의 언어로 시대의 억압을 고발했으며, 이는 조합원들을 규합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 수진농조에 드리운 탄압의 그림자
수진농조의 활동은 구체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지주의 일방적 소작권 박탈, 소작료 인상, 타조법 강요 등 부당한 관행에 맞서 조합원들과 집단으로 대응했다. 서울까지 올라가 지주와의 면담을 주선하기도 했다.
1931년 11월 일본인 부재지주(不在地主)가 도조법에서 타조법으로 소작 방식을 일방적으로 변경하자, 조합은 장주문(1906~?)과 이원섭(1904~?)을 파견해 항의하고 조건을 관철시켰다. 종자 지급과 부당 착취 개선도 요구했다. 남상환은 수차례 현장에 나서 지주와 담판을 벌였다. 수진농조의 활동은 평택·고덕·오산 등지로 확산됐고, 조합은 각지 소작쟁의의 버팀목이 됐다.3
그러나 일제는 정당한 활동조차 ‘치안 유지’를 명분 삼아 범죄화했다. 일제가 1925년 제정한 ‘치안유지법’은 사회주의 사상 탄압 법령으로, “국체 또는 사유재산 부정 활동”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4
1931년 12월 수원경찰서 순사부장은 수진농조를 “소작쟁의를 빌미로 한 반제 공산주의 비밀단체”로 규정했고, 남상환·박승극·장주문·이원섭·김영상(1908~?) 등 간부들을 치안유지법 위반과 위력 업무방해 혐의로 체포했다.5 경찰과 검찰의 신문은 가혹했다. 남상환은 반복되는 심문에 점점 피폐해졌다.
폐결핵 얻은 남상환, 25세로 세상 떠나
장례식, 경기 전역서 조문행렬 배웅
2007년에야 건국훈장, 수훈 유족 없어
■ 법정에 선 농민들, 형무소에 남은 청년들
1932년부터 시작된 예심은 길고도 고통스러웠다. 수진농조 간부들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최대 1년 6개월에 이르는 미결수 생활을 견뎌야 했다. 장기 구금은 일제가 농민운동의 동력을 꺾기 위해 자주 써온 전형적 수법이었다. 이들은 가족과 생업, 동지들과 분리된 채 차디찬 형무소에 갇혔다.6
긴 수감 생활 끝에, 마침내 법정에서 희망의 문이 열리는 듯했다. 1933년 3월27일 경성지방법원은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7 재판부는 “범죄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늦은 정의는 정의라 할 수 없었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처였다.
특히 남상환은 예심과 재판을 견디는 동안 폐결핵을 얻었다.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미 회복이 어려웠다.8 결국 남상환은 석방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33년 4월19일 스물다섯 나이로 세상을 떴다.9
남상환의 장례식에는 수원, 진위, 양감, 평택 등 경기 전역에서 모인 조문객 600여 명이 줄을 이었다. 흰 천을 두른 관과 검은 조기, 논길 따라 이어진 장례 행렬은 항거와 연대의 상징이었다. 민중은 그를 고요히 떠나보내지 않았다. 억울한 죽음은 침묵 속의 시위가 됐다. 그는 공동체의 기억으로 남았다.10

■ 마지막 투쟁, 이번엔 우리가 고소한다
남상환의 장례가 끝난 지 한 달여 뒤, 동지들은 다시 법정으로 향했다. 1933년 5월27일 박승극, 김영상, 장주문은 신태악 변호사를 통해 경성지법에 보상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무죄로 풀려났지만 오랜 미결수 생활에 대한 국가 책임은 누구도 묻지 않았기에 이들은 스스로 그 책임을 물었다. ‘하루 1원 이상 5원 이내’ 금액을 기준으로 한 청구였다.11
박승극 480일, 김영상 462일, 장주문 488일. 이들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보낸 구금일수다. 숫자는 고통의 무게를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침묵을 깨고 법정에 섰다. 또 하나의 투쟁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재판의 결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판결문과 당시 보도가 남아 있지 않거나, 아직 발굴되지 않아 향후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그날 다시 법원을 찾은 이들의 마음속엔 이런 말이 맴돌았을지 모른다. ‘남상환은 죽었지만, 살아 돌아왔다.’ 그 문장은 단지 한 사람의 부활이 아닌, 짓밟힌 진실의 복원을 의미했다.
박승극, 해방후 사회주의계 창작활동
작품집 남겼지만 월북뒤 이름 잊혀
주류역사속 지워진 이들 다시 부를때
■ 기억에서 지워진 경기 농민운동의 역사
그러나 그 진실은 오래 기억되지 않았다. 해방 후 국가가 선택한 기억의 질서 속에서 경기 농민의 투쟁은 지워졌다. 학계와 지역사회 일부에서만 회고됐을 뿐 교과서와 공적 역사에선 언급조차 없었다.
이 공백은 단순한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었다.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 아래 ‘농민’ ‘사회주의’ ‘조직’이란 단어는 금기시 됐다. 남상환은 2007년에서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지만 유족이 없어 아직 수훈하지 못했다.
함께 기소된 박승극은 해방 후 수원군 인민위원장을 지냈고, 이후 사회주의 계열에서 창작을 이어가다 월북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담은 작품은 전집으로 남았지만, 그의 이름은 기억에서 멀어졌다.
독립운동의 역사는 다양한 사상과 선택의 갈래 속에 있었고, 결코 단일한 시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해방 이후의 정치적 선택만으로 삶 전체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맥락을 놓치는 일이다. 한 사람의 삶을 온전히 기억하고 의미를 판단하는 일은 특정 체제나 국가가 독점할 수 없는, 시민 모두의 몫이기도 하다. 수진농민조합 사건은 단지 지역의 운동이 아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무엇을 주류 역사로 남기고, 무엇을 지워왔는지를 되묻는다. 그리고 이제 말해지지 못했던 그 이름들을 다시 불러야 할 때다.

■ 소작농의 고통, 타조법과 도조법은?
당시 소작료 징수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수확량의 절반가량을 지주가 가져가는 ‘타조법(打租法)’이었다. 타조법은 수확량에 따라 소작료를 책정하기 때문에 지주는 해마다 절반의 소출을 무조건 가져갔다. 다른 하나는 ‘정액소작료제’, 일명 ‘도조법(賭租法)’이었다. 정해진 액수를 매년 지주에게 내는 방식이었다. 경기지역 농촌은 타조법이 일반적이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정액소작료제가 적용됐다.
[출처]
1) 김해규, 평택항일운동 학술세미나 기억과전승Ⅱ, ‘일제강점기 평택지역의 사회운동-1920~30년대를 중심으로’, 2009, 37-40쪽 2) 이동근, ‘1910~20년대 식민농정의 지역적 전개와 지주제 - 수원(水原)지역을 중심으로’, 사림 제24권, 206쪽 3) 김해규, 위 논문, 39쪽 4) 일제강점기 경성지방법원 기록 해제, 南相煥 외 4명(치안유지법 위반), 한국근대사료DB 5) ‘조선일보’ 1931년 12월1일자 기사 6) ‘조선일보’ 1932년 1월17일자 기사 7) ‘동아일보’ 1933년 3월28일자 기사 8) ‘동아일보’ 1933년 3월21일자 기사 9) ‘동아일보’ 1933년 4월22일자 기사 10) ‘동아일보’ 1933년 5월2일자 기사 11) ‘동아일보’ 1933년 6월4일자 기사

/유혜연 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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