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의 ‘서유견문’ [한국근대문학관 컬렉션·(9)]

박경호 2025. 8. 6. 18:34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천문화재단 공동기획> 근대화의 길을 연 최초의 서양 답사기

1889년 완성·1895년 도쿄 고쥰샤서 자비 출판
총 20편으로 구성… 국한문 혼용체의 대표 사례
고위 관료에 무료 배포… 개화·계몽 의지 보여

한국근대문학관이 소장한 유길준의 ‘서유견문’. 우리나라 최초의 양장본이다. 2025.7.24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조선 후기 활동한 개화사상가 유길준(1856~1914)은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 국비 유학생(1881~1882년)이자 미국 유학생(1883~1885년)이었다. 무려 140년 전 유럽을 여행한 우리나라 초창기 ‘근대적 여행자’이기도 했다.

유길준이 1889년 완성하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895년 4월 출간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기행문으로 불린다. 그러나 ‘서유견문’의 내용을 뜯어보면, 단순히 기행문이라기 보다는 세계의 현황과 서양 문물·제도 등을 망라한 ‘백과사전’ 또는 개화·계몽을 목적으로 한 ‘근대화 개론서’에 가깝다.

이 책은 20편으로 구성됐다. 1~2편은 지구 세계 설명과 6대주로 나눈 국가의 구분, 세계의 주요 산·바다·강·호수·인종·물산 등을 소개한다. 3~18편은 서양 문물과 제도를, 19~20편은 미국·유럽의 대도시 풍경을 전한다.

대표적 개화론자였던 유길준은 조선 후기 국내외 정세 변화에 따른 정치적 혼란상을 몸소 겪었다. 1884년 12월4일 갑신정변 이후 귀국해 개화파로 분류되면서 7년 동안 연금 생활을 했으며,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일본에서 12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조선의 열악한 현실 속 서구의 근대 발전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유길준의 생각이었고, 그가 ‘서유견문’을 펴낸 이유였다.

유길준이 이 책을 집필한 때는 연금 상태였으므로 곧바로 출간하지 못했다. 유길준의 일본 유학 시절 스승이자 당시 일본 베스트셀러였던 근대화 개론서 ‘서양사정’을 쓴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가 주선해 1895년 4월25일 도쿄의 고쥰샤(交詢社)에서 자비로 출판했다. 유길준은 책 1천부를 인쇄해 서울로 들여왔고, 정부 고위 관료와 유력자들에게 무료로 배포했다고 알려졌다. 계몽에 대한 유길준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국근대문학관이 소장한 ‘서유견문’을 보면, 고급스러운 양장본으로 표지를 꾸몄다. 인쇄된 지 130년이나 지난 책임에도 단단하게 엮였다. 한글 연활자(납으로 만든 활자)로 쓰인 우리나라 최초의 양장본으로 알려졌다. 가로 16.1㎝, 세로 22.3㎝ 크기에 556쪽 분량으로, 짙은 녹색의 양장 표지에는 문자 표기가 없고 내제지에 ‘개국 498년(1889년)’에 유길준이 ‘집술’(輯述)했다고 돼 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 1편에서 대륙별 나라 이름을 소개하는 내용. 한자와 한글 표기를 함께 썼다. 2025.7.24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것은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이다.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서적(1885년 발행 ‘농정촬요’)은 아니지만, 국한문 혼용체의 대표적 사례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과 김영민 교수는 2009년 쓴 논문 ‘근대계몽기 문체 연구 : 유길준을 중심으로’(동방학지)에서 ‘서유견문’의 국한문 혼용체에 대해 “국문과 한문의 혼용이란 당시로서는 곧 하층과 상층의 언어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라며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통해 세상의 변화를 알리고자 했고, 그것을 변화된 문체로 전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서유견문’은 국문학이나 국어학뿐 아니라 역사학, 철학, 지리학, 가족학, 행정학, 교육학, 조경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구되는 책이다. ‘서유견문’을 다룬 학술 논문만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서 100건 이상 검색된다. 그만큼 자료적 가치가 큰 책이며, 앞으로도 계속 연구될 만한 텍스트다.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Copyright © 경인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