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 경영자에게 ‘아보하’는 없는가?

동 키호테가 추구한 정의는 많은 사상가와 철학자의 과제이다. 정의에 관한 많은 논의와 주장을 모두 통찰한 것이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교수의 명저 <정의; JUSTICE> 이다. 그는 정의의 판단 기준을 세가지로 집약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며, 평등한 위치에서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고, 사회공동체 대다수의 윤리적 판단을 기반으로 한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세가지를 다 만족한다면 틀림없는 그 시대의 정의이겠지만, 어느 하나라도 결핍된다면 정의라고 말하기 힘들어진다.
세가지 요건 중 하나가 결핍된 사례로 유명한 것이 ‘트롤리 딜레마’이다. 시속 100km로 돌진하는 트롤리(전차)가 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났으므로 누구도 그 속도를 줄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대로 두면 철로에서 작업하는 인부 5명이 모두 사망할 절박한 상황이다. 이 때 철로 위 육교에서 이런 위기 상황을 파악한 관리자가 있다. 그의 옆에는 몸집이 육중해서 질주하는 트롤리(전차)를 몸으로 충분히 저지할 만한 사람이 있었다. 관리자가 그 사람을, 그의 자유로운 동의없이, 철로에 밀어 떨어뜨리고 희생시켜5명을 살렸다면 과연 그는 정의로운가?
샌델 교수는 정의에는 “어쩔 수 없이 판단이 끼어든다”면서, 사회구성원의 올바른 가치측정과 윤리를 강조하고 있다. 즉, ‘정의는 이것이다’ 라는 식의 단정보다는, 사회 구성원들이 건전한 윤리관과 가치관에 입각하여 지속적으로 추구해 나가야 하는 이슈임을 강조한다. 정의는 사회구성원인 이상 누구나 각자 활동영역에서 늘 생각해야 할 최고의 선이다.
사회구성원에는 자연인(사람)과 법적으로 인격을 부여 받은 법인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법인의 대표적 유형은 회사이고 통상 기업이라 칭한다. 기업은 시장경제 시스템에서 가계 및 정부와 함께 3대 경제주체이다. 대기업은 한 나라가 아니라 글로벌경제를 유지하고 이끌어가는 견인차이다. 따라서 주주와 회사 자체의 이익만을 기업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다. 기업의 경영자는 투자자, 경영자, 근로자, 공급망(Supply Chain) 종사자 그리고 소비자까지 모두를 기업의 이해관계자(Stakeholders)로 생각하고, 그들의 이익을 균형 있게 판단하고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경영에서의 정의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경제주체에게 작년 말부터 밀어닥친 여러가지 대 내외적 이슈로 조용할 날이 없다. 눈을 가린 채 칼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가 추구하는 ‘사법정의’는 예나 지금이나 상존하는 이슈이지만, 유독 올해에 많은 분란을 야기했다. 이제 그 이슈가 잠잠해 지니 공평한 분배에 주안점을 두는 경제정의가 경영자와 정부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생각해야 할 현안으로 떠올랐다. 노동법과 상법의 개정, 기업과 대주주의 세금 인상을 위한 세법 개정 등이 그 이슈의 한 가운데에 있다.
현재 노동법 개정안처럼,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원청 기업을 상대로 단체교섭 하는 것을 하청업체 노조에게 허용하고, 기업의 해외투자, 사업장 이전, 구조조정 등 고도의 경영상 판단까지 노동쟁의 및 단체협상 대상으로 포함되도록 노동법을 개정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광우병 파동과 같은 사회적 혼란 등 우여곡절 끝에 얻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과실인 무관세가 갑자기 사라지고, 자동차, 반도체, 조선 등 핵심산업이 관세폭탄을 맞는 현실에서 설상가상으로 법인세까지 올리는 것이 과연 국가경제 전체를 위한 관점에서 볼 때 정의로운 조치일까? 트롤리 딜레마처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로 인해 희생되는 것은 없는가?
기업의 사전적 정의는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 판매하는 조직” 이다. 그러나 이제 ‘이윤 추구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기업에 관계된 모든 이해관계자들과 대중의 생각이다. 그 배경에는 자본주의 부작용의 심화, 지구 온난화와 환경보호 그리고 기업 영향력의 폭발적 팽창 등이 있다. 20세기 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이윤창출” 이라고 주장했다. 이윤이 있어야 주주에게 배당을 주고, 새로운 투자로 더 좋은 상품과 서비스를 소비자에게 제공할 수 있으며, 더 많은 세금을 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기업은 본질적으로 주주, 근로자, 채권자, 경영자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Stakeholders)의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라는 주장이 학자들에 의해 제기되었고 대중의 공감을 받기 시작했다. 기업의 이윤은 주주 뿐 만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정의의 관념을 기저에 깔고 등장한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이 사회적으로 인용되는 분위기에서, 2019년 200여 명의 미국 주요 대기업 CEO로 구성된 단체(BRT)가 공급망, 임직원, 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도 배려하는 정책을 펼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기업이 추구해야 할 정의에 대해 획기적인 시각의 변화를 보여준 것이다.
정의에 관한 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와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미국에서, 하청업체의 노조는 원청의 경영자와 직접 교섭할 수 있는가? 법적으로 직접적인 고용관계가 없는 한, 원청은 하청 노조와 협상할 이유가 없다. 다만, 원청 사업장 내에서 생산 활동하는 하청의 노동법상 의무불이행이나 법규 위반이 있는 경우 원청이 하청과 함께 연대책임을 지는 경우는 더러 있다. 또, 기업의 경영판단에 대해서는, 설사 경영환경이 격변하여 주주의 이익에 해가 되는 것으로 그것이 변질되더라도, 경영자(또는 등기이사)의 배임죄나 책임을 추궁할 수 없고 협상대상도 아니다. 그것이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ement Rule)’이며, 영미에서 판례로 확립된 것이다.
대다수의 기업에게 단체협상의 복잡성을 야기하고 경영권을 약화시키는 것이 과연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일까? 경영권을 희생해서 노조의 최대 이익을 보장한다면 ‘트롤리 딜레마’ 사례와 같아지는 것 아닐까? 관세전쟁, 날로 복잡해지고 경영자를 압박하는 노동법, 경영판단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배임죄, 경영권을 위협하며 더 세지는 상법, 법인세 인상 등의 이슈로 경영자는 하루도 맘 편하게 지내는 날이 없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팀은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올해의 키워드로 ‘아보하’를 들었다. 아주 행복한 것도 싫고, 심지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도 싫다. 행복 하지도 불행 하지도 않은 일상, 즉 ‘아주 보통인 하루(아보하; Very Ordinary Day)’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추세를 대변한다. 경영자에게도 ‘아보하’가 필요하다. 그것은 무사안일이 아니라 혁신을 위한 시간이다.
정부와 노동계가 동 키호테처럼 현실과 유리된 채 이상만을 추구하는 정의의 기사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기업을 산쵸 판사(Sancho Panza)로 여겨 동 키호테 가는 길에 무조건 동참하도록 끌고 가서도 안된다. 정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도 추구해야 하지만, 그 과정은 공감대를 형성하여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것이어야 한다. 트롤리 딜레마처럼 일방의 무고한 희생을 강요해서도 안된다.
[진의환 매경경영지원본부 칼럼니스트/ 소프트랜더스㈜ 고문/ ㈜삼기 북미법인장/ 前 현대자동차 중남미권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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