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크리에이터] ‘그랜마’ ‘마실’…마을은 오늘도 ‘정겹고 포근한 향기’ 가득
도시재생사업으로 남산마을과 인연
적적한 어르신에게 일자리·취미 제공
할머니들과 따뜻한 기억 향기로 담아
정겨운 이름 달고 향초·디퓨저로 탄생
여가시간에는 실크 스크린 수업 진행
지역 갤러리·독립서점서 2주간 전시
“마음 복잡할땐 ‘다정한 향’이 특효”

어릴 적 시골 할머니 댁을 생각하면 정겨운 향기가 떠오른다. 푸르른 풀 내음부터 사랑이 듬뿍 담긴 할머니표 요리 냄새까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남산마을엔 이 따뜻한 기억을 할머니들과 함께 향으로 담아내는 이가 있다. 바로 향기 전문 브랜드 ‘링크앤라이프 릴리’(이하 릴리)를 이끄는 강민서 대표(36)다.
“릴리에선 남산마을 할머니 8명과 함께 정답고 포근한 향기제품을 만들고 있어요. 할머니들은 ‘아로마캔들 지도 사범’ 자격증을 가진 전문가로, 향낭(香囊)인 사셰 1500개를 4시간도 안 걸려 뚝딱 만드실 정도로 손이 빨라요.”

향초·사셰·디퓨저 같은 제품을 만드는 마을 할머니들의 평균 나이는 75세다. 할머니들은 ‘예쁘게 만들어야 받는 사람도 기분 좋지’라는 마음으로 향초 하나에도 애정을 가득 담는다. 향 이름도 정겹다. 할머니의 텃밭과 푸르른 시골집을 떠올리며 조향한 ‘그랜마’에선 토마토꼭지향과 나무향이 나고, 남산마을 산책길 풍경을 표현한 ‘마실’엔 꽃과 과일향을 넣었다. 향긋한 비누향인 ‘낮잠’은 할머니 무릎에 누워 잠들던 어린 날처럼 포근하다.

강 대표가 남산마을과 인연을 맺은 계기는 2018년 도시재생사업이다. 천안에서 자란 그는 대학원을 다니러 서울로 갔지만 주말마다 천안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고향 같은 천안에서 고유한 자원을 찾아 재밌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그후 참여한 남산마을 도시재생 설명회에서 할머니들을 처음 만났다.
당시 남산마을은 노후된 건축물이 많고, 인근 하천이 자주 범람해 침수 위험이 컸다. 젊은이들은 점점 떠나고 마을엔 노인들만 남았다. 집에서 혼자 적적한 시간을 보내는 어르신도 많았다. 이를 눈여겨본 강 대표는 도시재생사업에서 ‘내 친구의 얼굴 그리기’ ‘꽃 그림 그리기’ 같은 문화 수업을 열었다. 마을 할머니 10명 이상이 참여했고 “칠십 평생 처음 물감을 만져본다”는 이도 있었다. 그때 강 대표는 단순한 예술 체험을 넘어 할머니에게 하나의 역할을 드리고 싶어졌는데, 그것이 마을을 향기로 물들이는 시작이었다.
“할머니들과 오래 이어갈 수 있는 사업이 뭐가 있을까 한참 고민했죠. 그중 향기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감각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할머니들 정성이 담긴 제품을 사용하면서 추억을 되살리길 바랐습니다.”
2020년엔 공방을 열고, 남산마을 풍경을 담아 조향도 했다. 처음엔 “캔들이 뭐냐” “이거 제사 초 아니냐”고 묻던 할머니들은 아로마캔들 지도 사범 자격증에 도전해 전문성을 키웠다. 총 30시간 이상 받아야 하는 교육에서 다양한 재료로 여러 모양과 색깔의 향기제품을 만드는 법을 익혔다. 30년 넘게 남산마을에 살고 있는 김오순 할머니(77)는 “여러 향료와 아름다운 꽃을 넣어 처음 초를 만들어봤는데 참 재밌다”고 수줍게 웃었다. 직접 만든 향초나 사셰를 자식과 손주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80대 김경자 할머니도 “소일거리가 생기고 월급도 받으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며 “첫 월급을 들고 마트에 가서 생활용품을 사던 순간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강 대표와 릴리 직원은 할머니의 일자리뿐 아니라 여가 시간도 예술로 물들인다. 최근엔 실크스크린부터 꽃꽂이 수업까지 함께했다. 특히 결과물이 바로 나오는 콜라주나 실크스크린 작업이 반응이 좋다. 할머니의 알록달록한 실크스크린 작품은 마을 갤러리와 천안역 근처 독립서점에 2주 넘게 전시되기도 했다. 작가가 된 할머니의 모습에 가족과 지인의 축하도 이어졌다.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노력도 계속된다. 강 대표는 제품 홍보를 위해 타 지역으로 직접 나선다. 7월부턴 서울 성수동에서 조향 수업을 열어 릴리의 향기와 철학을 널리 알리고 있다. 강 대표는 “제품이 잘 팔려야 할머니들과 같이 지낼 수 있으니 홍보하러 열심히 다니고 있다”며 “떠나기 전 ‘힘내서 다 팔고 와’라고 손주 대하듯 응원해주고, 다 못 팔고 돌아오면 같이 속상해하신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책임감이 더 생긴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와 함께 일하는 직원 모두 할머니 손에 커서 어르신들과 일하는 게 부담되지 않아요. 흔히 휴식이나 안정을 취하려고 집에 가곤 하잖아요? 저는 마음이 복잡하면 회사로 올 정도로 이곳이 편해요. 남산마을 공방에서 할머니들과 만든 다정한 향을 한번 맡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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