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남해 관음포]6. 노량해전의 실제 전장은 관음포

남해 사람들은 관음포를 호국의 성지라고 부른다. 고려 팔만대장경의 판각지, 삼별초 유적지, 정지 장군의 관음포 대첩에 이어 이순신 장군의 노량해전이 관음포에서 치러졌기 때문이다.
1598년 8월 무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합쳐 무려 7년간 끌어왔던 조선과 일본의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년 8월18일, 이하 음력) 가 철수 명령을 내리고 사망하면서 막을 내린다.
노량해전은 철수하려는 일본군과 이를 막아선 조명연합군이 충돌한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는 최대의 전투였다.

◇사천왜성 전투 대패와 노량해전
1596년 9월 명과 일본 간에 개전 이후 4년간 끌어왔던 협상이 최종 결렬되자 일본은 이듬해인 1597년 정유년에 다시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했다.
바다에서는 거제 칠천량(7월15일)에서 원균 장군의 조선 수군을 대파하고, 육지에서는 남원(8월15일), 전주(8월19일)를 잇달아 함락했다.
기세를 몰아 북상하던 일본군은 충청도 직산(9월7일)에서 명군에 저지당하고, 바다에서는 명량(9월16일)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일본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 남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방어에 주력했다.
1598년 1월 조명연합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주둔한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주변 일본군의 계속되는 지원으로 함락에 실패했다.
왜성 공략에 어려움을 겪던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이 서로를 지원할 수 없도록 적의 주요 거점인 울산왜성과 사천왜성, 순천왜성 3곳을 동시 공격하는 마지막 반격 작전을 구상하게 된다. 이 작전은 바다에서 수군을 비롯해 모두 4갈래 방향에서 공격한다고 해서 '사로병진' 작전이라고 부른다.
울산왜성은 동로군, 사천왜성은 중로군, 순천왜성을 치는 병력은 서로군이라 하고 1598년 9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이 작전은 첫 전투인 사천왜성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처참한 실패로 이어진다.
1598년 9월19일 중로군이 3만에 달하는 병력으로 1만여 병력이 포진한 사천왜성을 공격했지만, 전투 도중에 갑자기 명군의 진영에서 화약고가 폭발하는 혼란을 틈타 일본군이 성문을 열고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엄청난 병력 손실과 함께 막대한 보급물자를 일본군에게 빼앗기는 예상치 못한 대패를 당했다.
그 패전의 흔적이 사천왜성에 있는 '조명군총'이다. 희생자 대부분이 명나라 군대이기 때문에 사실상 명군총이라고 하는 게 타당하다는 견해도 있다.
9월 22일에는 동로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처럼 동로군과 중로군의 공격이 연이어 실패로 돌아가자, 순천왜성을 포위한 서로군은 공격의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채 사실상 이순신 장군의 수로군만 공격하는 형국이 됐다.

당시 순천왜성에는 1만5000여 명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이 포위돼 있었는데 이들 병력을 구출하기 위해 사천을 비롯해 고성, 하동 등 남해안 곳곳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의 병력이 결집하게 된다.
노량해전에 투입된 핵심 부대는 사천왜성에서 중로군을 대파한 시마즈 요시히로의 부대였다. 시마즈의 부대는 본국에서 철수 명령이 떨어졌지만, 집결지인 부산으로 이동하지 않고 300여 척의 함대를 꾸려 순천왜성으로 향했다.
노량해전을 주도한 적장이 사천왜성의 시마즈 요시히로라는 점에서 사천왜성의 대패가 노량해전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남겼다.

◇관음포, 7년 전쟁의 마침표를 찍다
일본군 함대가 몰려온다는 첩보를 받고 조명연합군은 11월18일 오후 명 수군은 노량 방면으로,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로 향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이 순천왜성을 공격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지금의 남해대교가 있는 좁은 노량의 해협을 물길을 이용해 빠르게 통과하려고 했다.
18일 늦은 밤 무렵, 노량해협을 빠져나온 일본군 함대는 일단의 조명연합군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신속하게 순천왜성으로 가야 했던 일본군 함대는 이들과의 교전 대신 관음포의 바다로 우회를 선택하는데, 그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판옥선 60여 척을 앞세워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본군 함대는 퇴로가 완전히 막혀버린 상황이 됐다. 19일 새벽 조선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약한 명의 수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필사적으로 퇴로를 찾으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명의 장수 등자룡이 전사하고 제독 진린이 일본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부닥치자, 조선 수군이 구출에 나섰다.
새벽이 밝아오자 상황을 파악한 순천왜성의 고니시의 부대는 먼 바다로 달아났다. 적장 시마즈도 대장선이 공격당하자 작은 배로 옮겨타고 도망을 쳤다.
신윤호 해군사관학교 연구위원은 "일본군이 함대를 이끌고 통과하는 지점이 남해와 사천 사이의 바다인 노량이었다"면서 "이순신 장군은 이러한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고 처음 노량에서 대치하다가 점차 관음포로 일본군을 유인해 공격했다"고 말했다.
불과 하루 남짓에 일본은 200여 척의 적선이 침몰당하거나 나포되는 피해를 보고 1만이 넘는 병력을 상실했다.

그에 비하면 조선의 피해는 가벼웠다. 다만 유독 지휘관의 인명피해가 컸다. 일본군 수뇌부는 대부분이 탈출했지만 조선은 최고지휘관인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 이영남, 이언량 등 지휘부가 상당수 전사했다.
이는 살아 돌아가겠다는 일본과 7년간 조선과 백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준 일본군을 절대 살려두지 않겠다는 조선군 지휘부의 의지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당시 일본군의 조총 유효사거리가 50여 m 정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순신 장군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은 당시의 전투가 적과 아군의 전선이 뒤섞여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이순신 장군은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 관음포를 마지막 전장으로 선택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 전쟁 최후의 전투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전투로 남아 있다.
임명진·김윤관기자



서재심 남해군문화관광해설사 "남해 관음포는 역사교육의 현장"
"관음포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고 이겨왔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는 공간입니다.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재평가 받기를 기대합니다"
서재심 남해군 문화관광해설사는 "남해 관음포는 우리 민족의 호국 역사가 담긴 장소"라고 표현했다. 실제로 관음포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면 호국이란 단어가 절로 떠올려진다.
서 해설사는 "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전장으로 관음포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라면서 "이순신 장군의 호국 의지가 담겨 있다"라고 말했다.
서 해설사는 "여러 기록을 보면 장군은 7년 동안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이 너무나 컸고, 삼국시대부터 일본에 많은 문물을 보내준 은인의 나라인데 감히 그걸 저버린 일본을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군의 숱한 압박에도 순천왜성에 대한 포위를 풀지 않았다. 서 해설사는 "일본군을 그냥 돌려보내면 또다시 침략해 올 수 있다며 다시는 침략을 꿈꾸지 못하도록 최대한 큰 피해를 줘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노량해전이 벌어진 장소는 지금의 이순신 바다 공원에서 보이는 앞 바다이다.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가 육지에 처음 내린 곳이 지금의 이순신 바다공원에 있는 '이락사'이다. 장군의 유해는 충렬사로 갔다가 배를 타고 임시 통제영이 설치된 전라도 고금도로 옮겼다.
그 뒤 고향인 아산으로 옮기는데 그때가 1599년 2월 11일이다.
노량해전이 노량 바다가 아닌 관음포에서 실제 해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예상외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
서 해설사는 "남해의 역사에 대해 알려지지 못한 부분이 여전히 많다. 지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의 연구가 좀 더 활성화되고, 호국의 성지 관음포가 제대로 평가받았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임명진기자 sunpower@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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