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파병군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광복 80주년-다시 평화]

최석환 기자 2025. 8. 4.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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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파병군의 사죄

민간인 여부 확인하지 않고 살해
'반세기' 지나도 죄책감 따라다녀
"피해 가족 만난다면 반드시 사죄"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이 지난 1일 오후 창원 마산합포구 오동동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민간인 학살 문제를 이야기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최석환 기자

"그때 베트콩 용의자로 잡힌 남성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면…."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때 기억은 희미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58년째. 반세기 전 일이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엊그제 일처럼 총을 쏴 사람을 죽이고서 땅에 묻은 일이 선명하다. 해병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파병했던 김영만(80)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 이야기다.

그는 베트남 중부지역 띤또마을 등지에서 적군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사람을 조준 사격했다. 방아쇠를 당긴 기억에 여든이 된 지금 또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지난 1일 오후 창원 마산합포구 오동동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만난 김 고문은 "적군인지 아군인지, 심지어 민간인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죽였다"고 고백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러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미안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무감각해진 사살 행위 = 김 고문은 1966년 10월 베트남 전쟁에 파병됐다. 1965년 5월 만 19살 나이에 해병대 병 165기로 자원입대하고 나서 1년 5개월 뒤다. 스스로 선택한 파병은 아니었다. 의무 참여였기 때문이다. 그랬어도 어떠한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파병 역시 해병대 훈련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1967년 3월까지 5개월 남짓 생활했다. 짜빈동 전투가 있었던 베트남 중부지역에 박격포 부대 수평통제원으로 투입됐다. 수평통제원은 포탄이 떨어지는 지점을 계산한 다음 핀을 꽂아 포사격 부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역할이다. 직접적으로 다수 적군과 대면해 전투하는 직무는 아니다.

김 고문은 전투 현장에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중대원들은 누군가 진지에 들어오려는 사람이 포착되면 적으로 간주하고 총을 쏘아댔다. 부대 내부 총기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은 대원 등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매일 같이 크고 작은 인명피해를 마주해서인지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잡아 온 베트남인, 그리고 총살 = 김 고문은 파병 4개월이 조금 넘은 시기에 중대 보병들이 수색 정찰을 나갔다가 잡은 베트콩 용의자를 총살했다. 3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성이었다.

김 고문은 "우리가 즉결처분하기로 했다"는 한 충청도 출신 부대원 말에 용의자를 죽일 부대원 4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됐다. 이 넷은 "용의자를 살려서 보내봤자 베트콩이 돼서 돌아올 거다"라는 부대 내부 이야기에 베트남인을 데리고 원형 철조망을 지나 진지 밖 100여m까지 나아갔다.

야전삽을 던져주며 자신이 묻힐 구덩이를 파게 했다. 김 고문은 그가 죽음을 직감한 듯했다고 느꼈다. 그에게서 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도 그를 허리 정도까지 푹 파인 구덩이 앞에 세워놓고 어떻게 사살할지 골몰했다.

"대원들이 잔혹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많은데 우리가 그냥 간단히 죽여서야 하겠느냐는 말이 나왔었다. 나는 간단하게 머리를 겨냥해서 죽이자고 제안했다. 결국 네 명이 둘러싸서 각자 한 두발씩 총을 쏘고 묻었다."

옷은 피범벅이 됐다. 그대로 부대에 복귀했다. 김 고문은 마침 점심시간이라 바로 숟가락부터 들었다. 소대장이 "야 이 새X야. 피가 묻었는데 옷도 안 갈아입고 밥을 먹냐"고 한소리를 했다. 김 고문은 그제야 옷에 피가 범벅이 돼 있다는 걸 알았다. 죽음에 아무런 감각도, 생각도 없었다는 의미다.
김영만 열린사회희망연대 상임고문이 지난 1일 오후 창원 마산합포구 오동동 열린사회희망연대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숨진 이 어머니에게 거짓말 = 남성을 죽인 그다음 날, 짜빈동 마을 입구에서 연안중대 보병 보초를 서던 중대원이 숨을 헐떡거리면서 김 고문을 찾아왔다. 한 할머니가 아침부터 몇 시간째 울고 있다고 했다. 가라고 고함쳐도, 위협해도, 달래도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더니 기본 인사말과 같은 문장 일부를 외운 게 전부였던 김 고문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나가 보니 부대 입구에 있던 할머니는 손에 약탕기 같은 그릇을 들고 서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 아들이 여기에 며칠 전 잡혀 왔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내 손으로 죽인 사람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면해야 할지 고민했다. "며칠 전에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오늘 아침에 헬리콥터를 타고 포로 수용소로 보냈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할머니가 "오늘 아침에 헬리콥터 안 떴다"며 거짓말이라고 했다. 부대 헬기 쪽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다. 실제 그날 기상 악화 문제로 헬기는 뜨지 않았다.

할머니는 울면서 김 고문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한참을 그러다가 "손에 들고 있는 게 뭐냐"고 뭐냐는 김 고문 질문에 죽을 쒀서 가져왔다고 했다. 김 고문은 "그 죽을 가져다주겠다"며 부대 안에 들어갔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든 생각은 '이게 무슨 일이지?',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거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부대 밖에 다시 나갔을 때는 7~8살 남자아이 둘이 우산을 들고 할머니와 함께 울고 있었다. 죽을 풀에 붓고 조금 남긴 다음 20~30분 뒤에 할머니에게 가져다줬다. 죽통 뚜껑을 열어 보여주자 할머니가 대성통곡을 했다, 이것도 다 못 먹었느냐는 것이었다. 배가 불러서, 다른 음식을 먹은 게 있어서 그렇다고 둘러대도 울음은 멈추지 못했다. 날이 어둑해지기 시작하자, 우는 이들을 뒤로하고 부대 안으로 돌아왔다."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 도티낌리엔 씨가 지난달 6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 소재 버짜이 논 학살 위령비 앞에서 향초에 불을 붙이고 있다. /최석환 기자

◇부상 복귀 후에야 알아차린 전쟁의 단면 = 김 고문이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 뒷날에 짜빈동 전투가 일어났다. 남성을 죽인 4명 중 1명은 죽었고, 김 고문을 포함한 나머지 3명은 다쳤다. 김 고문은 포탄인지 수류탄인지 모를 파편에 얼굴을 맞아 광대뼈와 코뼈를 크게 다쳤다. 다른 한 명은 턱이 날아갔다. 또 한 명은 배에 총상을 맞고 귀국했다.

더는 현장에 있을 수 없었다. 김 고문은 한동안 베트남 다낭지역 군 병원에 머물렀다. 다치고 나서야 전쟁에 혐오를 느끼기 시작했다. 전쟁이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과도 연결됐다. "병원에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전쟁은 아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몽을 꾼 것 같았다. 몸이 성한 동기가 없었다. 전쟁도 싫고, 전쟁하는 군대도 싫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김 고문은 파병 후 전쟁이 극도로 싫은 나머지 국가 혜택을 몽땅 거부했다. 화랑무공훈장을 받고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대에서 부상 등급을 매기는 원호 심사도 받지 않고 전역했다.

"보통은 군대에서 파병에 따른 보상을 많이 받고자 했을 거다. 그랬다면 직장도 원하는 대로 갈 수 있었을 거고, 애들 교육도 무료로 했을 거다. 나는 그런 혜택을 모두 포기했다. 오죽 전쟁이 싫었으면 그랬겠나. 아무런 보상도 받기 싫었다."

◇거리낌 없던 학살, 뒤늦은 후회 = 김 고문은 다친 몸으로 우여곡절 끝에 전역하고 나서 자신이 했던 행위를 돌이켰다. 특히 부상 전 어떤 신분인지조차 확인하지 않고 사살했던 남성이 베트콩이 아닌 민간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면 그때 총을 쏴서 살해했던 사람은 아무런 죄가 없는 민간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신분인지 확인도 하지 않았었고, 생명에 아무런 인식조차 없는 채로 그런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됐다. 물론 그가 베트콩일 수도 있겠지만, 베트콩이라 한들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나에게 위해를 할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김 고문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정신적으로 견디기가 쉽지 않다. 죄의식에 몸서리친다. "그동안 죄책감이 엄청나게 컸다. 일하다가 일이 잘 안 풀리면, 사회 생활하다가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내가 이전에 베트남에서 큰 죄를 지어서 그랬다고 생각했다.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불행한 일이었다."

언젠가 피해 가족을 만난다면 사죄는 물론, 어디에 시체를 묻었는지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당시에 만났던 그 할머니와 손자를 찾으려고 베트남에 두 차례 간 적도 있었다. 결국 만날 수는 없었다. 무고한 베트남 사람들에게 사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갔었다. 보상도 하고 싶었다. 현장에서 꿇어앉아 울기도 많이 울었다. 죽은 동료도 생각났다. 이미 세상을 떠난 피해자께서는 저세상에서 제발 편안하면 좋겠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행복한 나라,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면 한다."
버짜이 논 학살 피해 생존자 쩐티선 씨 남편 응우엔떤륵 씨가 지난달 6일 오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소재 자택 주변에서 한국군 만행을 설명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정상적 사고 어려웠던 참전군인들 = 김 고문은 전쟁을 두고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을 포함한 참전군 역시 전쟁 특성 탓에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맨정신으로 총을 쏠 수 없다. 적을 죽이는 것조차 그렇다. 내가 파병 갔던 부대가 민간인을 학살하던 부대는 아니었지만, 그 당시 내가 여느 학살부대에 있었다면, 나 또한 그들처럼 죄 없는 여성과 노인, 아이들을 죽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파병 시기에 한국 군인들이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다. 현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민간인들은 베트콩을 지원하는 사람이라는 인식, 그리고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베트콩이 될 거라는 인식이 만들어낸 비극이다. 파병군 중 한 명으로서 너무나 가슴 아프고 죄스럽다."

김 고문이 인정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정부는 이를 인정하기는커녕 공식 사과조차 한 적이 없다. 이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그 유족들은 지속해서 한국 정부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한베평화재단을 비롯한 피해생존자 연대 주체들은 피해자 목소리에 응답하라고 정부에 요구한다. △국가책임을 인정한 판결 수용 △민간인 학살 등 인권침해 사실인정과 공식 사과 △현재 진행 중인 국가배상소송 관련 상고 취하 등도 촉구 중이다.

그나마 이번 정부에서는 과거 역사를 두고 다른 정부에서 보이지 않던 분위기가 감지된다. 행정안전부가 지난 공개한 6월 19일 열린 제26차 국무회의 속기록을 보면, 이재명 대통령은 조태열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우리는 베트남에 공식적으로 가해한 일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느냐"라고 먼저 묻거나, "베트남 국민은 (한국에) 사과하라고 하지 않나"라고 질의했다. 아울러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면서 "외국인 근로자를 받을 때 인도적 차원에서 베트남 쪽을 많이 받아줘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 고문은 정부 차원 민간인 학살 책임 인정뿐 아니라 파병 후 정신적으로 문제를 겪는 옛 파병 군인들을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이 힘들면 병원 치료받아야 하는데 과거에는 그러기 어려웠다. 술로 풀었다. 베트남 다녀온 사람들이 술 마시고 행패 부린다는 말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국가적인 지원을 못 받고 일찍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일찍이 국가가 챙겼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전쟁에 나섰던 군인들도 피해자라는 점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최석환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