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잇단 ‘친밀관계 범죄’ 근본적 처방 필요
‘가정폭력’ 전자발찌 조항 없고… 반의사불벌죄, 보호엔 걸림돌
판결 나와야 위치추적 장치 부착
동정심·보복 두려움 느낀 피해자
처벌 불원 의사 밝히면 조치 못해
구속 영장에 재범 위험성 첨부하고
관련 사건땐 의무체포 도입 주장도

경찰의 안일한 대처로 공분을 산 동탄 납치 살인, 대구 스토킹 살인, 부평 가정폭력 살인 사건 이후에도 ‘친밀한 관계’인 연인이나 배우자 등으로부터 여성이 살해되는 참혹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스토킹·폭행 등을 당한 피해자가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고도 살해당하는 사건이 잇따르자, 경찰청은 강력한 피해자 보호 조치를 시행하고 구속 수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반복되는 유사 범죄를 막기 위해선 결국 법 개정과 제도 개선 등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가정폭력처벌법 ‘전자발찌’ 조항 없고 ‘반의사불벌죄’도 걸림돌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지난달 29일 발생한 교제 살인 사건을 수사 중인 대전서부경찰서를 찾아 “스토킹처벌법에 따라 접근금지 조치 중인 3천여명에 대해 전수 점검을 실시하겠다”며 “재범 위험성이 높은 이들에 대해선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등을 법원에 추가 신청하겠다”고 했다.
스토킹처벌법에 따라 법원은 스토킹 행위자에게 접근 금지뿐만 아니라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유치장·구치소 유치 등을 명령할 수 있다. 하지만 현행법상 가정폭력 가해자에겐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 전까진 위치추적 전자장치를 부착할 수 없다. 법원이 가정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명령할 수 있는 ‘임시조치’와 ‘피해자보호명령’에는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에 대한 조항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는 지난 2023년 ‘임시조치’ 조항에 관련 내용을 추가하겠다고 밝혔으나 입법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스토킹·가정폭력 등의 사건 현장에 출동한 일선 경찰관이 피해자에게 가해자 처벌 의사를 묻는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어 피해자 보호 제도가 무용지물이 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피해자가 연인이나 배우자인 가해자에게 동정심, 친밀감을 느끼거나 보복을 두려워해 경찰에 가해자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찰청의 ‘가정폭력 대응 및 수사 매뉴얼’에도 피해자가 상습적 폭력에 노출된 경우엔 명확한 의사 표현을 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신고 현장에서 피해자에게 가해자 처벌 의사를 묻는 것을 지양하라고 명시돼 있다.
지난달 29일 대전 서구 주택가에서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30대 여성도 과거 그에게 폭행을 당한 뒤 경찰에 처벌불원서를 제출했었다. 피의자는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재물 손괴와 주거 침입, 폭행 등으로 4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지만, 경찰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김효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원은 “친밀한 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피해자의 처벌 불원 의사를 무조건 따라선 안 된다”며 “수사기관이 피해자가 처한 상황과 가·피해자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고 범행의 심각성을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 “확실한 가·피해자 분리 ‘구속’ 사유에 ‘재범 위험성’ 추가해야”
경찰청은 지난달 14일부터 스토킹이나 가정·교제폭력을 저지른 고위험 가해자에게 재범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고, 평가 결과를 구속 영장 신청서에 첨부하기로 했다. 이 방침에 따라 대구중부경찰서는 한 여성에게 4개월간 100여 차례 전화를 걸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원치 않은 연락을 해온 10대 남성을 지난달 21일 구속 송치하기도 했다.
아내를 살해한 ‘부평 가정폭력 살인 사건’의 피의자도 재범 위험 징후를 보였다. 인천삼산경찰서는 지난해 12월 흉기를 들고 아내를 협박한 이 남성에 대해 과거 형사 입건된 적이 없는 초범이라는 이유로 법원에 구속 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 피의자는 접근금지 명령 등 6개월간의 임시조치가 풀린 지 일주일 만에 앙심을 품고 아내를 찾아가 살해했다. (6월23일자 6면 보도)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재범 위험성 평가 결과는 현행법상 ‘고려 사항’일 뿐이다. ‘대구 스토킹 살인 사건’의 경우 경찰이 스토킹 가해자에 대한 구속 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그가 성실하게 수사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형사소송법상 구속 사유는 피고인이 일정한 주거가 없거나 증거 인멸, 도주의 우려가 있을 경우로만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조국혁신당 정춘생(비례) 국회의원은 4일 ‘재범의 위험성’과 ‘피해자 등에 대한 위해 가능성’을 구속 사유에 포함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 “수사기관의 안일한 인식이 문제”, ‘가해자 의무체포’ 주장도 제기
친밀한 관계 범죄를 연인이나 가족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다툼으로 치부하는 수사기관의 안일한 인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달 31일 여성 인권 단체들은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스토킹의 위험성을 판별하지 못하는 수사·사법 기관을 개혁하라”며 “위험성을 판별할 능력이 없다면 모든 여성 폭력 사건에 대해 ‘의무체포주의’를 도입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1994년 연방 차원에서 여성폭력방지법을 제정한 미국은 가정폭력 사건의 가해자를 무조건 체포하는 ‘의무체포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 23개 주는 경찰이 경범죄에 해당하는 가정폭력의 가해자도 일단 체포한 뒤 조사를 진행한다.
최선혜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처장은 “신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가해자의 재범 가능성을 판단하기 어렵다면, 미국처럼 모든 가정폭력 가해자를 우선 체포한 뒤에 철저히 수사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선아 기자 su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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