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포럼] 오래된 여행자- 김재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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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 작은 집들이 보였다.
'이십오 년 만인가 엊그제 같은데, 느티나무 잎새도 푸르고 우물도 그대로잖아' 사내는 노란 지붕의 집을 오래 바라봤다.
구두 앞코가 하얗게 헤진 걸로 봐서 사내는 먼 곳에서 왔고 오래 걸었던 걸로 보였다.
머리는 감은 지 오래되어 떡졌고 빛이 바랜 보랏빛 치마와 목이 늘어나 어깨가 드러난 흰색 면 티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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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 작은 집들이 보였다. 바람이 천천히 불었지만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흩날렸다.
사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십오 년 만인가 엊그제 같은데, 느티나무 잎새도 푸르고 우물도 그대로잖아’ 사내는 노란 지붕의 집을 오래 바라봤다. ‘저기가 나의 집이군’ 집 앞에는 푸른 이끼가 낀 깊고 검은 우물이 보였고 우물 담장에는 작은 두레박이 물방울을 찰랑찰랑 흘리며 가을빛에 매달려 있었다.
사내는 갈증이 나는 듯 우물을 향해 걸었다. 사내가 걸을 때마다 낡은 구두에서 모래알이 서걱거리며 흘러내렸다. 구두 앞코가 하얗게 헤진 걸로 봐서 사내는 먼 곳에서 왔고 오래 걸었던 걸로 보였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작은 모래성이 섬처럼 돋아났다.
사내는 느티나무에 기댔다. 느티나무 이파리는 초록빛에 버무린 듯 봄바람을 타고 반짝거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지? 어떻게 집에 올 생각을 한 번도 안 한 걸까. 왜 갑자기 집이 생각난 걸까? 내게 집이 있기는 했나? 없던 집이 갑자기 생긴 걸까, 내가 걸어간 여기가 꿈속이고 꿈에게 빚을 너무 져 눈을 뜬 채로 꿈속을 헤매며 집을 찾는 걸까?
사내는 자신이 가진 기억을 더듬었다.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군’ 머리를 세차게 흔들자 눈 속에서 노을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자 열서넛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녀가 다가왔다. 소녀는 기이했다. 머리는 감은 지 오래되어 떡졌고 빛이 바랜 보랏빛 치마와 목이 늘어나 어깨가 드러난 흰색 면 티를 입고 있었다. 더구나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는 게 아닌가. ‘내가 본 소녀 중 제일 이상하군. 더구나 검은 머리에 노란 해바라기라니’ 소녀는 사내 곁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낯선 사내의 무릎에 손을 올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같이 부르자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하늘에 흰 구름이 지나고 흰 구름은 양떼가 되어 갔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느티나무 아래, 사내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 꿈속인가? 왜 내가 이 이상한 소녀의 노래를 듣고 있는지, 어쩌다 나는 여기에…’ 사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가 부르는 노래는 잘 아는 동요라서 쉽게 멜로디에 빠졌다. 해당화도 나오고 꽃밭도 나오고 바닷가 수평선 너머 갈매기 한두 쌍이 나오자 사내는 슬퍼서 참을 수 없었다. 노래가 끝나자 다정하게 소녀는 말했다.
“아빠, 이제 집에 가요” ‘뭐 아빠? 내가?’ 하지만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왠지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노란 지붕이 그려진 집으로 들어섰다. 현관문을 열자 소녀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사납게 눈을 뜨고 소리 질렀다 “어디 있다가 이제 와?” 사내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지만 여자의 기세에 눌려 한 마디도 대꾸할 수가 없었다. ‘분명 난 이십오 년 만에 집에 왔는데. 집은 분명 그대로인데 딸과 아내라니…. 이 여자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사내는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차분히 생각했다. ‘그렇군! 여기는 이 세상이 아니야. 너무 걷다 보니 전생까지 걸어갔군. 그렇다면 온 길만큼 다시 걸어야겠군. 길이 사라지기 전, 길을 놓치기 전’ 사내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내가 일어서려는데 바깥에서 두 모녀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빠의 병이 점점 더 심해져요. 내일도 모레도 영영 오늘을 살 거 같지 않아요” 순간 사내의 머리가 하얗게 새며 시간이 빨라졌다. 온 길만큼 걸어야 하는데 다시 걸을 수 없는 길이 생겨나고 있었다.
지나온 시간들이 한여름 꿈 같다. 폭염과 열대야에 잠을 설치지만 꿈에서는 무더위가 없다. 관찰자가 될 뿐이다.
이제 본격 휴가철이다. 산으로 강으로 멀리 해외로 집을 떠나도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는 게 한여름 뙤약볕 같지만 잠시 멈추고 꿈같이 달콤한 휴가를 맞으시길 바란다.
김재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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