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안 물고문’에 떨자…그들이 물었다 “얘, 전기 했어?”
4화 1980년 5월과 나</strong></span>
10·26, 5·18 격랑…역사의식 눈떠
5·18 즈음 기자협회장 은신 돕다가
두달 뒤 새벽 남영동 대공분실로
욕설 듣다 욕조에 머리 처박혀
옮겨 간 방에서 이근안 첫 조우
‘칠성판’에 몸 묶인 채 물고문
고문 방에서 생리 시작되던 날
몸서리치게 싫던 그날의 기억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에게’
30년 뒤 ‘페미니스트웹진 이프’ 기고

1980년 5월, 26살의 나는 너무 괴로웠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준엄한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학창시절 운동권도 아니었던 초짜 기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역사 의식에 눈을 뜨고 나니 광주에 대한 부채의식과 함께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힘겨웠다. 당시 5·18 광주항쟁이 벌어지면서 합동통신 기자협회 분회에서는 ‘검열 거부와 제작 거부안’을 놓고 기자총회를 열었다. 업무가 끝난 저녁 시간에 열린 이 총회에서 문단에 데뷔한 작가였던 한 선배는 “차라리 펜을 꺾을지언정 역사에 죄를 짓지는 맙시다”라고 띄엄띄엄 말을 하고는 그냥 앉아 버렸다. 그 한마디 때문인지 강제해직 기자 명단에 포함됐던 선배는 멀리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 가 살다가 거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가혹하고 무서운 시절이었다, 그때는.
그즈음 5월18일 당일이거나 하루 전이었을 것이다. 한국기자협회장이었던 김태홍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기자협회 동료들이 잡혀갔다는 연락을 받고 집을 못 들어갔는데 은신처를 소개해 줄 수 있느냐는 전화였다. 당시 나는 새롭게 깨어난 역사 의식으로 괴로워하던 때인지라 선배의 부탁이 너무나 반가웠다. 나는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 선배를 친구 노현재의 서울 독립문 인근 화실에 숨겨줬다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잡혀가게 되었다.
남영동에 끌려가 처음 고문을 당할 때는 거기가 어딘지, 나를 고문한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이라는 이름과 그의 실상을 알게 된 것은 수년이 흐르고 지금은 고인이 된 김근태 당시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이를 폭로하면서였다. 신문에 난 이근안의 사진을 보고 나는 단번에 얼굴을 알아봤다. 나를 고문한 그를, 그리고 닷새나 같이 지낸 그를, 어떻게 몰라보겠는가?
이근안을 처음 만난 건 1980년 7월17일로, 그날이 제헌절이었기에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김 선배를 화실에 숨겨준 내 친구 노현재와 함께 새벽에 신원미상의 남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검은 안대로 눈이 가려진 채 승용차에 탔는데,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간 곳이 바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담담했다. 각오했던 일이기도 했고, 또 솔직히 사람 하나 숨긴 게 무슨 큰 죄이며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 뭐 그런 생각이었다. 그들은 기를 죽이려는 듯 처음에는 ‘년’자를 붙인 험악한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을 했다가, 다시 정중하게 ‘기자’ 대접을 했다가, 또다시 뒷덜미를 잡고 물이 담긴 욕조에 머리를 쑤셔 박았다가 하며 냉·온탕을 오가는 작전을 썼다.
그리고는 “이재문이 죽어 나간 방으로 가야겠다”고 하더니, 다른 방으로 옮기라 했다. 민족일보 기자였던 이재문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으로 1979년 구속된 뒤 고문을 당했고, 이후 건강이 악화해 1981년 수감 중 숨졌다. 나는 그때 이재문이 누군지도 몰랐다. 옮겨 간 방에는 삼사십대의 건장한 남자들 여럿이 몽둥이를 들고 둥글게 모여 있었고, 고문대로 쓰이는 이른바 ‘칠성판’이 가운데 놓여 있었다. 누군가 내게 칠성판 위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고, 나는 그 위에 올라가 본능적으로 몸을 엎드렸다. 그러자 다시 누군가 돌아누우라고 했고 돌아누운 내 몸 위에 안전벨트 같은 버클이 주르륵 채워지고 육중한 몸집의 남자가 올라탔다. 그가 바로 이근안이었다.
곧바로 얼굴 위에 수건을 덮어씌우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얼마 당하지도 않은 내가 고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물고문을 한번 당한 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온몸이 물에 젖어 한여름인데도 사시나무 떨듯 하였고 담요를 여러장 뒤집어써도 추위가 가시질 않았다. 그때 경험한 추위는 한여름 날씨나 실내 온도와는 전혀 무관한 추위였다. 담요를 뒤집어쓴 내 눈에 아마도 다음 순서로 준비된 듯한 빨간 고춧가루가 반 이상이 담긴 투명한 물컵이 보였다.
가장 괴로웠던 일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 방에 들어온 다른 수사관들이 담요를 뒤집어쓰고 덜덜 떠는 날 보고선 “얘 왜 이래? 얘 전기 했어?”라고 물었다. 그때 알았다. ‘아 전기고문도 하는구나. 앞으로 어떤 일을 더 당할지 알 수 없구나.’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정말로 겁이 났다.
거기서는 모든 일이 내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밥 먹는 일도 큰 일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밥을 전혀 먹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밥을 못 먹는 내게 영양제라며 초콜릿색 당의정을 입힌 알약 두개를 강제로 우유와 함께 먹게 했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자 식사가 들어왔는데 돼지순대국 같은 음식이었다. 나는 비위에 안 맞는 국물을 억지로 떠먹다가 결국 모두 토하고 말았다.
방 안에 있던 변기에 먹은 것도 없어 액체만 게워 올렸는데 나중에 보니 검붉은 핏빛 액체가 나왔다. 그걸 본 그들이 놀란 듯했다. 그들은 “너 죽으면 우리가 큰일”이라며 의사를 수배하느라 난리를 피웠다. 휴일이라 그런지 한참을 수배한 뒤에 수도육군병원의 군의관이라는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나를 진찰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진찰하고 ‘쇼크’에 ‘탈진’이라고 진단을 내리며 링거 주사를 처방했다.
어인 일인지 잠시 방 안에 군의관과 나 단둘만 남은 상황이 되었다. 나를 찬찬히 살펴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의사의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살펴보던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한쪽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그런 손길이었다. 아마도 그는 단발머리 티셔츠 차림의 젊은 여자를 보고 운동권 학생이라고 추측을 했던 것 같다. 실제 남영동 대공분실에 있던 닷새간 끔찍한 사람들만 맞닥뜨렸던 건 아니었다. 거길 지키는 헌병(?)들한테 내 이력서가 돌았는지 수사관들이 퇴근한 다음에 젊은 친구가 나한테 와서 자신이 대학 후배라며 자작곡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고, 또 여름이라서 그랬는지 아이스크림을 사다 준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는 모든 일이 끝났나 보다 했다. 이미 조서는 다 꾸며졌고 처분만 기다리고 있던 터라 수사관들도 와서는 잡담이나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난감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생리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처럼 여자라는 사실이 싫었던 때가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던 나는 결국 침대에 누워 링거 주사를 꽂은 채로 나를 고문했던 이근안을 불렀다.
“아저씨… 저 생리가 터졌는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이근안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생리대와 팬티를 사다 주면서 “내가 생전 여자 속옷을 사봤어야지. 가게 가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냐?”라면서 마치 무용담을 털어놓듯이 호들갑스럽게 여자 팬티 사온 얘기를 동료들 앞에서 했던 것은 기억난다.

그로부터 32년이 흐른 2012년 1월 이근안이 ‘반공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1980년 7월 나를 물고문 했던 그에게 “아무리 간첩을 잡아도 왜 사람을 고문하는 일을 하냐”며 “직업을 바꾸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해 1월17일 ‘페미니스트웹진 이프’와 오마이뉴스에 목사가 되어 있던 이근안에게 목사직에서 스스로 내려오라는 권고의 편지글을 썼다.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에게’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나간 탓인지, 그 글은 금방 인터넷 검색 순위 1위를 달리며 많은 이들에게 읽혔다. 그리고 그 글이 나간 직후 이근안에게 목사 안수를 줬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총회에서 안수 철회를 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유숙열 | 나이 서른을 넘긴 1980년대 중반부터 극렬 페미니스트로 살고 있다. 합동통신 기자로 재직 중 1980년 해직된 뒤 1982년 결혼해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1984~1990년 미주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일하며 뉴욕시립대 대학원에서 여성학 석사학위 취득. 1991~2004년 문화일보 국제부 차장, 생활건강부장, 여성전문위원. 1997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if)를 창간했다. 2003~2006년 2기 방송위원회 위원. 현 이프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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