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선풍기 갑질’ 아파트에 호소문… 72세 경비원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지역 커뮤니티 통해 알려진 ‘갑질’ 논란
선풍기 틀고 근무 ‘관리비 아깝다’ 항의
생일 앞두고 손글씨 호소문 작성해 부착
“나이 먹고 이런 일… 억울하더라고요”
지난 겨울엔 전자레인지도 치운 적 있어

‘선풍기 치우라는 주민이 계십니다. … 경비원이 근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만들어 주세요.’
지난달 31일, 부천시 원미구에 위치한 A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는 사인펜으로 꾹꾹 눌러 쓴 종이 한 장이 붙었다. ‘호소문’이라 적힌 이 글은 해당 동 경비원이 직접 작성해 부착한 것이다. 폭염 속 작은 선풍기조차 문제 삼은 민원 소식이 지역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지면서, 이른바 ‘선풍기 갑질’ 논란으로 번졌다.
4일 오전, 이 호소문을 붙인 경비원 박정일(72)씨는 에어컨 없는 경비실에서 기자를 맞았다. 전날 내린 비로 습기까지 더해진 실내에는 소형 선풍기 하나만 돌아가고 있었고, 박씨의 이마에서는 땀이 흘렀다. 다음 날이면 만나이로 일흔셋을 맞는다는 그는 생일을 앞두고 호소문을 작성했다.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묻자 박씨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게 과연 맞는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선풍기 하나 틀고 있었던 건데…. 너무 더워서 그런 거예요. 작년에도 틀었는데 그땐 아무 말 없었고요. 올해 갑자기 민원이 들어왔다니까 참 당황스러웠어요. 나이 먹고 이런 일을 겪으니 괜히 내가 뭘 잘못했나 싶기도 하고.…. 억울하더라고요.”

민원이 들어온 건 며칠 전이었다. 여느 때처럼 초소 안에서 선풍기를 틀고 근무하던 중 ‘관리비가 아깝다’는 항의가 접수됐고, 선풍기를 치워달라는 말까지 들었다. 비슷한 일은 지난 겨울에도 있었다. 도시락을 데워 먹으려 전자레인지를 하나 주워다 초소에 뒀지만, “왜 그런 걸 쓰느냐”는 민원 끝에 결국 치워야 했다. “다 제 돈으로 마련한 거였는데, 그마저도 안 된다고 하니까…. 좀 서글펐죠.”
서러움도 잠시, 박씨가 붙인 호소문은 예상 밖의 반응을 이끌어냈다. 극단적인 민원이 먼저 주목받았지만, 박씨를 지지하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는 ‘경비실은 업무 공간입니다. 냉방권은 기본입니다’, ‘경비 선생님 감사합니다. 갑질은 이제 그만’ 같은 쪽지가 붙었고, 박씨에게 생수병을 건네는 주민도 있었다.
지지하는 주민들 목소리 하나둘 나와
현장서 만난 주민들 황당하다 입 모아
‘갑질은 이제 그만’ 같은 쪽지가 붙기도
관리사무소장 “호소문 불이익 없을 것”

현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선풍기 갑질’이 황당하다고 입을 모으며, 경비실 에어컨 설치는 당연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박씨가 근무하는 동에 거주하는 유모(30대)씨는 “선풍기조차 안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고, 김모(40대)씨는 “경비실 에어컨 설치가 왜 찬반 문제인가?”라고 반문했다. 옆 동에 사는 김모(60)씨도 “여름에 이런 데서 어떻게 일하란 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A아파트는 1995년 준공된 단지로, 60대 이상 고령 경비원 18명이 교대로 근무 중이다. 정문 초소를 제외한 각 동 경비실엔 에어컨이 설치돼 있지 않고, 화장실이 딸린 6.6㎡(2평) 남짓한 공간에서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견디고 있다.

이번 박정일씨의 호소는 단순한 민원 대응을 넘어, 에어컨 하나 없이 폭염을 견디는 경비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다시 들춰냈다.
A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은 “작년에 선풍기 16대를 일괄 지급했다. 에어컨 설치도 계속 논의해왔지만 올해 사업은 신청이 끝났고, 지자체 지원도 단지당 한 대 수준이라 현실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호소문으로 인해 해당 경비원이 불이익을 받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혜연 기자 pi@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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