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밀물] AI의 추천, 슈퍼 아저씨의 조언

"주문하실 상품이 도착했습니다." 몇 년 전 어느 잡지에서 읽은 구절이다. 주문한 상품도 아니고, 주문하실 상품이라니. 가까운 미래에 이런 메시지를 받을 거라던 예측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알고리즘은 내가 듣고 싶은 음악, 내가 보고 싶은 동영상과 영화를 줄줄이 추천한다. 아마도 이커머스 플랫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객이 '주문하실 상품'을 배송하고 싶어 안달이 나지 않았을까. AI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고양에 '이루다 청년모임'이라는 느린 학습자 청년들의 모임에 관한 기사를 읽은 기억도 난다. 2023년 경기마을공동체마을한마당에서 '최고마을상'을 수상한 청년들의 모임이다. 수제 캘리그래피 비누를 만든 다음 정발산동 주민자치회와 연계해 지역주민에게 나누는 일을 시작했는데, 참여 청년이 늘면서 가와지쌀과 장미가 고양 특산이라는 점에 착안해 쌀꿀라테와 장미 샹그리아 음료를 개발하고, '달패이의 꿈'이라는 베이커리 팀을 꾸려 카페를 창업했다 한다.
'주문하실 상품'을 배송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이루다' 같은, 결이 전혀 다른 움직임은 사실 계속 이어져 왔다. 장애인 자립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기관과 단체들의 실험이 끊어진 적이 없다. 20년 전 우리 동네에도 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이 꾸려가는 카페가 있었다. 이들이 운영하는 세탁소도 있었다. 카페와 세탁소는 결국 문을 닫았다. 지역주민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사라지는 현실이 새삼 우울하다.
AI는 계속해서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 줄 것이다. 내가 생각만 해도 상품이 도착하고,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보고 싶은 영화를 틀어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효율보다 관계, 예측보다 우발성, 데이터보다 기억의 장소들이다. 그러므로 AI시대가 되었어도, 지역성 회복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지역은 내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는 공간이며, 타인과 진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이다. 동네 청년들이 서로를 돕고, 주민들이 공유냉장고에 음식과 온기를 함께 채우는 일은 AI 기술이 결코 구현하지 못하는 인간성의 증거다.
지금의 흐름은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사소한 감각을 지키는 실천이 중요하다. 가끔은 자동추천 대신 동네책방에 가보고, 어떤 날은 알고리즘 대신 슈퍼 아저씨의 권유에 귀를 기울여 보는, 느린 선택과 대화가 필수적이다. 주문하지 않은 삶을 선택할 자유도 결코 포기할 수 없다.
/양훈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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