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60) 영웅들의 만남

강시일 기자 2025. 8. 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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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귀족사회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김유신과 김춘추 힘을 모아 핵심세력으로 등장,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성장
김유신 장군이 기거하던 집터에 남은 우물 재매정.

신라 천년을 통틀어 열 손가락에 꼽을 만한 영웅을 들라고 하면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빠지지 않고 앞줄에 거명된다. 문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주역 3인방으로 소개되는 인물이니 당연한 일이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출신성분과 사회적인 분위기 등으로 보아도 어려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입지전적인 인물들이어서 더욱 돋보인다.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라 해 귀족들로부터 제도권 안으로 들어서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김춘추는 할아버지가 불명예스럽게 신라 최초로 폐위된 왕이었다는 핸디캡으로 귀족의 중심 반열에 들기 어려웠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서로 뭉쳐 신라 최고의 영웅이 됐다.
경주 서악동에 김유신 장군을 모시기 시작해 설총, 최치원까지 봉향하고 있는 서악서원.

◆신화전설: 영웅의 탄생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 김춘추에 대해 길게 소개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김춘추, 삼국사기는 열전에서 김유신에 대해 출생과 성장과정, 사랑과 전쟁, 그들의 만남과 신화까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유신, 천신의 강림 북두칠성: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손꼽히는 김유신은 가야의 후손이자 신라의 왕손이다. 대부분 가야의 후손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모계로 따지면 김유신은 엄연한 신라의 왕손이다.

김유신의 아버지는 신라 각간 서현이다. 서현은 대가야 정벌의 최고 공신 김무력의 아들이다. 김무력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성왕을 잡고, 대가야를 정벌하는 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또 무력의 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다. 김유신은 가야 마지막 왕의 증손인 셈이다.

김유신의 어머니는 만명부인이다. 만명부인의 아버지는 숙흘종이다. 숙흘종의 부모는 진흥왕을 낳은 지소부인과 입종갈문왕이다. 입종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자 지증왕의 아들이다. 유신은 외척으로 보면 지증왕의 현손으로 누가 뭐라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신라의 왕손이다.
신라시대 최초로 제작되었지만 최고의 걸작으로 국보로 지정된 무열왕릉비의 귀부.

유신을 잉태하게 한 서현과 만명부인의 만남은 세상을 놀라게 할만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김유신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똑같이 별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이름을 별이름 신(辰)으로 지었지만 자라면서 너무나 큰 이름이라 오히려 액운이 생길까 염려, 믿을 신(信)으로 고쳐 유신이라 불렀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년인 595년에 태어났는데 해와 달과 목, 화, 토, 금, 수 별들의 정기를 받아서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으며, 또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 많았다.

서현이 숙흘종의 딸 만명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정황을 알아차린 숙흘종이 진흥왕에게 고해 서현을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발령했다. 그리고 서현이 만노군(지금의 진천) 임지로 떠날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하게 딸을 집안의 창고에 가두고 지키게 했다. 그러나 서현이 떠나기 전날 밤에 벼락이 만명이 갇혀 있는 문에 내리쳤다. 만명이 부숴진 문을 박차고 나와 서현을 따라 만노군으로 가 현지에서 유신을 낳았다.

-김춘추, 두 아버지의 아들: 진평왕이 말년에 아들이 없어 왕위를 물려줄 대상자를 물색하느라 고민이 깊었다. 생각 끝에 왕은 사위에게 왕위를 물려주리라 마음을 먹고 공주들의 혼인을 서둘렀다.

왕이 왕비의 이야기를 듣고 천명공주와 용수의 결혼을 발표했다. 천명공주가 어머니에게 용춘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그냥 '용숙부'가 좋다고 하여, 왕비는 당연히 형인 용수를 좋아하는 것으로 오해, 착오가 생긴 것이다. 엉뚱하게 용춘이 아닌 형 용수와 결혼하게 된 천명공주는 고민에 빠졌다.

이때 지혜가 뛰어난 덕만공주가 언니 천명공주에게 제의를 했다. 덕만공주가 "언니가 왕의 자리를 양보해 주면 내가 용수 숙부와 결혼하고, 언니는 용춘 숙부와 결혼할 수 있게 아버님께 허락을 얻어낼께"라고 제안해 결국 자매가 형제와 결혼하고, 덕만은 선덕여왕으로 즉위했다. 천명공주는 용춘과 결혼해 궁궐을 떠나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며 아들 춘추를 낳았다. 그러나 역사기록들은 아직 춘추가 용수의 아들인지, 용춘의 아들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무열왕릉의 비석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이수.

◆흔적: 서악서원과 무열왕릉귀부

서악서원은 설총과 김유신, 최치원을 봉향하는 서원이다. 1561년 서악동 615번지 일대에 건립돼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됐다.

처음에는 경주부윤 이정이 명종 16년에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면서 서원으로 발전했다. 경주지역 선비들이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같이 모실 것을 건의해 퇴계 이황의 의견을 들어 함께 배향하고 있다. 이황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명명하고 직접 글씨를 써서 현판으로 달았다.

서악정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탔다. 선조 33년 1600년에 경주부윤 이시발이 일부 중수하고, 1602년 묘우가 신축됐다.

인조 원년 1623년에 경주부윤과 선비들의 상소로 조정으로부터 서악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서악서원 편액은 당대의 이름난 서예가 원진해가 썼다. 강당은 시습당, 재사는 절차헌, 문루는 영귀루, 외삼문은 도동문으로 이름지었다. 서악서원은 유학을 강론하면서 경주의 학풍을 이어가는 중심이 됐다.
삼국통일의 주역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통일전 앞의 화랑지 산책로.

서악서원은 옥산서원과 함께 외문을 지나 문루, 동서재, 강당과 다양한 목적의 건물에 이어 내문을 지나 사당까지 우리나라 서원의 전통 양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보기 드문 문화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서악서원에는 신라시대의 초석과 석조물, 석탑재 등이 놓여 있어 서원의 위치가 신라시대 절터였거나 인근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짐작된다.

서악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편액을 받은 사액서원이라는 점과 조선시대 서원의 전통적인 건축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봉향하는 인물의 특별함으로 유명하다. 일반서원이 학문적으로 크게 성취한 인물을 배향하는데 서악서원은 가장 먼저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 문인이 아닌 무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 이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아들이자 강수, 최치원과 함께 '신라삼대문장'으로 손꼽히는 설총을 모셨다. 또 열두살의 나이에 당나라로 건너가 열여덟에 빈공과에 급제해 천하에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신라로 돌아와서도 '시무십여조'를 짓는 등 눈에 띄는 글을 남긴 최치원을 함께 배향하고 있어 유명하다.
통일전 앞의 화랑지 풍경.

◆스토리텔링: 영웅들의 인연

사랑을 찾아 궁궐을 떠나온 천명공주가 낳은 춘추는 영리하고, 튼튼하게 잘 자라 언니 선덕여왕의 명으로 화랑이 돼 궁궐을 드나들며 입지를 굳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들로부터 여전히 폐위된 왕의 자손으로 치부되며 중심세력의 자녀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김유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신은 탁월한 무력과 지혜를 가진 장군이자 화랑이었으나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귀족들의 자녀들은 노골적으로 따돌리며 중심세력권에서 배제시켰다. 유신은 어머니 만명부인으로부터 장부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따끔한 훈육을 들은 이후 깊이 고민하면서 중심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해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실력이 뛰어나지만 자신과 같이 중심세력에서 벗어나 있는 춘추와 결합해 세력을 키워야겠다고 판단하고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

김유신은 무엇보다 강한 결속력은 가족으로 맺어지는 일이라 생각하고, 춘추를 자신의 여동생과 엮어 가족으로 만들 계획을 치밀하게 꾸몄다. 그리고 여동생들을 불러 추궁하듯 계획에 따라 움직일 것을 종용하고는 모종의 전략을 빠르게 추진했다.

당시 유신은 무력이 뛰어나 활쏘기와 말타기, 축국, 창술 등 군사훈련에서 아무도 따르지 못할 정도로 눈부신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군사조직의 사병들은 전쟁과 같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으로 실력을 키우는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었다.
김유신과 김춘추가 서로 협력할 것을 다짐하며 건배하는 장면을 인공지능 AI가 그린 그림.

이러한 시간은 의례껏 김유신이 괄목할 만한 실력으로 병사들과 화랑들로부터 찬사를 들었고, 화랑 가운데는 뛰어난 자질을 가진 청년이 더러 있었지만 지혜와 용기를 동시에 가진 인물로 춘추가 돋보였다. 이를 눈여겨 살피던 유신이 드디어 춘추를 자신의 가족으로 삼기로 하고 행동에 돌입한 것이다.

병사들과 화랑들이 편을 나누어 축국시합을 하는 날이었다. 유신은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하면서 공을 차고 날아다니듯 하며 화랑들의 진을 흩어놓으며 골을 퍼부었다. 이에 뒤질세라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오는 춘추의 옷고름을 유신이 밟아 쭈욱 찢어버렸다.

"이를 어쩌나, 우리 집이 여기서 가까우니 집으로 가서 옷고름도 꿰메고, 곡차라도 한잔하면서 축국에 소질이 상당한 것 같던데 전술에 대한 이야기도 좀 하는건 어떨까"라며 유신이 춘추의 손을 잡아 끌었다. 춘추도 평소 흠모하던 뛰어난 무신이자 선배 유신랑이 이끌자 흔쾌하게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좋은 말씀 듣고 싶었습니다"며 따라 나섰다.

이들의 인연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유신의 집에서 어여쁘게 생긴 유신의 동생 보희와 문희가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차를 내어오고, 날렵하고 솜씨 좋게 옷고름을 수선해 왔다. 이를 기회로 춘추는 유신의 부름을 받아 유신의 여동생들을 자주 접하면서 유신과의 유대를 깊이 다졌다. 그러다 정이 깊어지면서 춘추가 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결혼을 하게 되고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성장한 문무왕 법정을 낳았다.

신라 최고의 영웅 김유신과 김춘추의 만남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이어져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주인공이 됐다. 인연은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으로 이루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두 영웅의 인연을 보면서 이해하게 된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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