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 역학·엔트로피 몰라도 눈물이… 물리학을 삼킨 연극
19세기 천재소녀와 21세기 과학자
두 시대를 오가며 미스터리 파헤쳐

표는 5분 만에 모두 매진됐다. 예매를 놓친 관객들은 취소표를 기다리며 매표소 앞을 서성였다. 표를 구한 운 좋은 관객들도 선착순 입장을 위해 시작 1~2시간 전부터 길게 줄을 섰다.
3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막을 내린 연극 ‘아르카디아’(연출·번역·각색 김연민)는 단연 최근 공연계의 화제였다.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시나리오로 오스카를 수상하고 영국과 미국 공연계 최고 권위의 로런스 올리비에상을 3회, 토니상을 5회 받은 영국 극작가 톰 스토파드(88)의 희곡. 배우들은 뉴턴 역학, 엔트로피, 프랙털, 카오스 이론, 낭만주의 대 고전주의, 영국 시문학, 남태평양 식물학까지 등장하는 지적인 대사를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게다가 영국 시골의 귀족 저택 응접실에서 1809년과 2025년, 두 개의 시간대가 병렬로 교차하는 만만찮은 서사다. 하지만 복잡한 물리학 이론 따위 몰라도 상관없다. 145분의 긴 이야기가 종착역에 다다를 때, 관객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훔치는 자신을 발견한다. 놀라운 연극이다.
◇현학적 대사에도 폭소 만발

배경은 영국 시골, 커벌리 가문의 영지 시들리 파크. 시인 바이런이 머물렀던 19세기의 저택에선 세계를 꿰뚫어 보는 직관을 가진 수학 천재 소녀 토마시나(김세원)와 어머니 레이디 크룸(강애심), 과학자인 가정교사 셉티머스(김민하)가 티격태격한다. 21세기의 저택엔 19세기 바로 그 공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복원하려는 학자 한나(김소진)와 버나드(정승길), 수학으로 세계를 이해하려는 과학자 발렌타인(권일)이 부딪친다. 추측과 해석을 통해 재구성된 과거는 불완전하고, 진실은 왜곡된다. 스토파드는 이 시간의 이중 구조를 통해 ‘앎’의 불완전성을 드러낸다.
번역과 각색까지 혼자 해낸 김연민 연출가는 섣부른 현학으로 관객을 고문하는 대신, 배우들의 역량을 믿고 한 장면씩 그림 그리듯 극을 끌어간다. 뚝심 있다. 덕분에 대사 속 정보량에 치이지 않는다. 대뜸 탁자 위로 뛰어올라 세계의 종말을 내다보는 19세기 소녀의 천재성, 21세기 학자들의 미궁 속을 헤매는 문학 토론, 아내의 바람기로 멱살을 쥐는 과학자와 시인의 모습에 관객은 그만 감탄하거나 깔깔 웃으며 흠뻑 빠져들고 만다.
◇“종말이 오더라도 함께 춤추자”

뉴턴 역학이 세계를 수학 방정식으로 환원하기 시작했을 때 인간은 마침내 세상의 질서, 시작과 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오만에 빠졌다. 하지만 토마시나는 말한다. “뭐야 기하학이 왜 또 나와. 산은 피라미드가 아니고, 나무는 원뿔이 아니야!”
데칼코마니처럼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결말에서, 현재의 사람들은 토마시나가 복잡한 수학 없이도 그림 그리듯 세계의 본질을 유추해냈다는 걸 깨닫는다. 뜨거웠던 찻잔의 차는 식고, 하얀 쌀 푸딩에 떨어뜨린 붉은 잼은 다시 분리할 수 없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무질서는 오직 증가할 뿐이고, 우주는 종국엔 미지근하게 얼어붙듯 멈춰설 것이다. 예정된 종말 앞에서 인간은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응접실 탁자 위에 21세기의 노트북 컴퓨터와 19세기의 양장본 책들이 함께 쌓여 가고, 마침내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며 사람들은 함께 왈츠를 춘다. 내일 세상이 끝난다 해도, 중요한 건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춤추는 것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시구에서 유래한 ‘아르카디아’는 고대 로마 시인들의 목가적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 그것은 유한한 시간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에야 비로소 펼쳐지는, 오직 연극만이 온전히 무대 위에 실현해 보여줄 수 있는 세계다.
연극 ‘아르카디아’는 1993년 초연 때 올리비에상 작품상을 받았다. 영국 왕립연구소(RIS)는 이 희곡을 ‘역사상 최고의 과학 저술’ 최종 후보작에 올렸고, 허핑턴포스트는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연극”이라고 상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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