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모임
이설야 시인 2025. 8. 3. 21:26

물을 붓고 불을 켠다 네가 탄 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복도에서 발소리와 말소리가 뒤섞인다 옆집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까지
불꽃이 일렁인다 기포가 수면 위로 솟구친다 오고 있니? 가고 있어 아직 오지 않은 너는 수화기 너머에 있다 잘 가라는 소리가 들린다 복도가 울린다 누군가 멀어진다
물을 다시 붓는다 들끓던 수면이 잦아든다 모르는 사람이 좋아지기도 해 낯선 말투로 울렁이게도 하고 같은 곳에서 만났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헤어져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숨고 싶은데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서로 다른 곳에서 함께 있던 시간을 떠올리기도 하고
물이 다시 끓어오른다 불꽃을 줄인다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다 네가 탄 버스에서 너는 내리지 않았고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해변으로
간다고 했다
황정현(1968~)
시인은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곧 도착할 사람을 위해 냄비에 “물을 붓고 불을 켠”다. 아직 그 사람은 도착하지 않고, 복도에서는 온갖 생활의 소리와 길 잃은 소음들이 귓속을 파고든다. 물이 끓는다. “오고 있니?” “가고 있어”라는 통화 끝에 “잘 가”라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그 사람은 다른 시간과 세계에 있는 듯 아득하게 멀기만 하다. 물이 끓다가 졸아든 냄비에 다시 물을 붓는다.
시인은 “모르는 사람이 좋아지”는 마음에 대해, “같은 곳에서 만났지만 서로 다른 시간에 헤어”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함께 있지만, 늘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있던 사람들과의 모임을 생각한다. 서로 안아주거나 등을 밀던 기억을 떠올리며, 상념과 번뇌로 다시 물을 끓인다. 들끓어 오르는 마음에 찬물을 붓는다. 가라앉는 마음, 다시 끓어넘치는 마음을 다독여보지만, 여전히 “전화기는 울리지” 않는다. 시인이 기다리는 사람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모임에 간 것일까. 해변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는 사람, 혹은 파도를 닮은 그 무엇을 기다리며 시인은 오늘도 마음에 불을 켜고 물을 끓이고 있을 것이다.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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