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15. 조선왕릉 창릉

하인수 경주대학교 특임교수·문학박사(풍수지리 전공) 2025. 8. 3.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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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권도 무덤도 허울뿐…'역풍수'에 자리잡은 예종
정자각
 창릉은 서오릉에 조성된 최초의 왕릉으로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한 능 형태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경릉의 의경세자 묘가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었으나 조성 당시는 세자 묘로 대군에 준하는 묘로 조성되었다. 의경세자 묘는 창릉 조성 이후에 아들 성종(성종 5년 1472년)에 의해 추존되었기 때문에 예종의 창릉보다 조성은 앞서지만 왕릉으로는 창릉보다 늦다.
왕후릉 전면
 예종은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인데 의경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조의 뒤를 이어 18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재위 기간은 14개월에 불과하다. 12대 인종의 9개월 재위가 가장 짧고, 두 번째로 재위 기간이 짧은 단명한 왕이다. 예종은 즉위 초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대신을 원상으로 삼아 이들이 서무를 의결하게 했다. 원상 제도는 신하들에 의한 일종의 섭정이었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명의 신하는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세조 측근 세력이었다. 이들은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 의결했고, 예종은 형식적으로 결재만 했다. 국정 처리는 물론 왕실에 관한 일 중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정희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종비 안순왕후는 한백륜의 딸로, 한명회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곧바로 병사하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예종이 사망하자 인혜대비, 명의대비에 책봉되었고 연산군 4년(1498) 53세로 사망해 창릉에 안장되었다. 예종이 19세에 승하하자 안순왕후에게 4세의 아들 제안대군 있었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의경세자의 아들이자 예종의 조카인 자을산군이었던 성종이 대를 잇는다.
예종릉 후면
 아버지 세조의 국장(1468, 9, 8~11, 28), 할아버지 세종 천릉(~1469, 3, 6) 등으로 예종 즉위 1년여 동안 세조의 국장과 세종의 천릉 등 두 번의 큰일을 치렀다. 아버지 세조 발인 후 정확히 1년 후 예종이 승하하면서 조정에서는 다시 한번 국장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예종 승하 직후 경복궁에서 즉위한 성종은 국력을 너무 소비한 탓인지 삼촌인 예종 능 조성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신숙주와 서거정 등을 국장도감 제조로, 조석문과 한백륜 등을 산릉도감 제조로 임명한 후, 여러 신하와 종친에게 능을 조성할 땅을 살피게 한다. 승하 열흘이 지난 12월 12일 신숙주, 한명회, 김질 등과 종친 이침, 이부에게 산릉 자리를 살피게 한다. 그리고 택지를 정한다.
금천교

 신숙주와 한명회(韓明澮)가 의묘(懿墓), 즉 경릉(敬陵)의 북쪽에 산릉(山陵)이 될 만한 땅을 다시 살펴보고 와서 좋다고 복명(復命)하니, 정인지(鄭麟趾), 영의정 홍윤성(洪允成), 김질(金礩), 우의정 김국광(金國光)에게 명하여 이침(李琛)과 이부(李溥)와 함께 다시 살펴보도록 하였다. 의묘(懿墓)란 의경세자 능호가 경릉(敬陵)으로 바뀌기 전의 능호이다. 가서 살펴보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 땅은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인지만이 홀로 아뢰기를, "이 산은 청룡(靑龍)이 높고 백호(白虎)가 낮으니 그다지 사용에 적합하지는 않으나, 다만 서울에 가까운 점만 취(取)할 뿐입니다."라며 반대를 하나 전교(傳敎)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르는 것이 옳다."며 산릉(山陵)에 갈 기일(期日), 즉 발인 날짜를 정하였다.

 창릉은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청룡이 높고 백호가 낫고, 청룡의 어깨 부분이 푹 꺼져 '황천살(黃泉煞)'이라고 부를 만큼 풍수에서는 매우 꺼리는 땅이다.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데 창릉은 왜 이런 곳에 조성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곳이다. 의도를 가지고 좋지 않은 곳인 줄 알면서도 택지를 한 것이다. 풍수를 통해 후손에게 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거꾸로 풍수를 통해 특정 후손의 절손이나 멸망도 초래한다. 이를 '역풍수'라고 한다. 다시 말해 당대의 실력자들이 예종의 묘터를 이곳에 쓰는 것에 정인지 외에는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인지는 세종대왕 때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풍수학을 직접 연구했으며 여러 왕릉 선정에 관여하는 등 풍수 이론과 실무에 능통한 대신이었다. 분명 왕릉으로 쓸 자리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조선왕릉 중 '역풍수' 논란이 있는 곳이 또 있다. 여기 창릉과 영조의 원릉, 정조의 건릉 등이다. 원릉과 건릉 편에서 '역풍수'에 대해 다시 다룰 것이다.

 예종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다. 큰아들인 인성대군은 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고,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었다. 역풍수 때문인지 제안대군은 서열상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사촌인 성종에게 자리를 빼앗겼고,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는 등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다가 끝내 자손 없이 죽었다. 딸 현숙공주는 병조판서를 지낸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에게 시집갔으나 임광재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당시 조정이 시끄러울 정도였으며, 끝내는 별거하고 후손 없이 죽어 예종의 직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