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수 박사의 조선왕릉 이야기] 15. 조선왕릉 창릉




신숙주와 한명회(韓明澮)가 의묘(懿墓), 즉 경릉(敬陵)의 북쪽에 산릉(山陵)이 될 만한 땅을 다시 살펴보고 와서 좋다고 복명(復命)하니, 정인지(鄭麟趾), 영의정 홍윤성(洪允成), 김질(金礩), 우의정 김국광(金國光)에게 명하여 이침(李琛)과 이부(李溥)와 함께 다시 살펴보도록 하였다. 의묘(懿墓)란 의경세자 능호가 경릉(敬陵)으로 바뀌기 전의 능호이다. 가서 살펴보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이 땅은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정인지만이 홀로 아뢰기를, "이 산은 청룡(靑龍)이 높고 백호(白虎)가 낮으니 그다지 사용에 적합하지는 않으나, 다만 서울에 가까운 점만 취(取)할 뿐입니다."라며 반대를 하나 전교(傳敎)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르는 것이 옳다."며 산릉(山陵)에 갈 기일(期日), 즉 발인 날짜를 정하였다.
창릉은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청룡이 높고 백호가 낫고, 청룡의 어깨 부분이 푹 꺼져 '황천살(黃泉煞)'이라고 부를 만큼 풍수에서는 매우 꺼리는 땅이다.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데 창릉은 왜 이런 곳에 조성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곳이다. 의도를 가지고 좋지 않은 곳인 줄 알면서도 택지를 한 것이다. 풍수를 통해 후손에게 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거꾸로 풍수를 통해 특정 후손의 절손이나 멸망도 초래한다. 이를 '역풍수'라고 한다. 다시 말해 당대의 실력자들이 예종의 묘터를 이곳에 쓰는 것에 정인지 외에는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인지는 세종대왕 때 왕명으로 집현전에서 풍수학을 직접 연구했으며 여러 왕릉 선정에 관여하는 등 풍수 이론과 실무에 능통한 대신이었다. 분명 왕릉으로 쓸 자리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조선왕릉 중 '역풍수' 논란이 있는 곳이 또 있다. 여기 창릉과 영조의 원릉, 정조의 건릉 등이다. 원릉과 건릉 편에서 '역풍수'에 대해 다시 다룰 것이다.
예종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다. 큰아들인 인성대군은 3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고,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었다. 역풍수 때문인지 제안대군은 서열상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사촌인 성종에게 자리를 빼앗겼고,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는 등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다가 끝내 자손 없이 죽었다. 딸 현숙공주는 병조판서를 지낸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에게 시집갔으나 임광재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당시 조정이 시끄러울 정도였으며, 끝내는 별거하고 후손 없이 죽어 예종의 직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