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구곡의 미학적 가치 자연과 정신의 아홉 굽이①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로, 서해와 동해를 거쳐 낙동강 수계의 분수령이 된다. 이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는 지리산까지 이어진다. 총길이가 1,625km이고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의 남한 구간만 해도 약 690km에 이른다.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 이어진 남한 구간의 백두대간(白頭大幹) 중 문경구간이 가장 긴 120km를 차지한다.
문경은 백두대간의 웅장한 산줄기와 그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줄기가 어우러져 천혜의 비경을 빚어낸 고장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경 가은읍에 있는'선유구곡(仙遊九曲)'은 이름 그대로 '신선이 노니는 아홉 굽이'라는 뜻처럼, 자연의 경이로움과 선비들의 깊은 철학이 조화롭게 녹아든 곳으로 손꼽힌다. 평평하고 너른 암반 위를 수정처럼 맑은 물이 수천 년 동안 흘러 기이한 물길을 만들고, 굽이마다 저마다의 사연과 미학적 가치를 품고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선유구곡은 제1곡 옥하대부터 제9곡 옥석대까지 이어지며, 각 굽이는 단순히 지형적 특징을 넘어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을 사랑했던 선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삶의 이치와 도를 깨닫고자 했으며, 이는 곡마다 붙여진 이름과 정태진(丁泰鎭, 1876-1956) 선생의 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도 선유구곡에서 도를 구했던 외재 정태진 선생의 발자취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제1곡 옥하대(玉霞臺)는 신비로운 입구를 나타낸다. '아름다운 안개가 드리우는 누대'라는 뜻의 옥하대는 선유구곡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다. 넓게 펼쳐진 흰 반석 위로 아침 햇살이 비치고 맑은 물결 위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마치 신비로운 선유의 세계로 들어서는 문과 같다. 정태진은 이곳을 "흰 돌에 아침 햇살 비쳐 밝게 빛나고 / 맑은 시내 찬 물결에 안개 붉게 오른다"라고 묘사하며, 자연이 선사하는 영롱한 신비감을 노래했다.
'신령한 뗏목 모양의 바위'를 뜻하는 제2곡 영사석은 선유구곡의 독특한 미학을 보여줍니다. 이곳은 무이구곡처럼 배를 띄울 수 있는 넓은 계곡이 아니었지만, 선인들은 뗏목 모양의 바위에 '신선을 불러 함께 노닐고 싶은' 염원을 담았다. 정태진은 "돌로 뗏목 삼아 선령을 부르거늘 / 시내 가운데 머무르니 세월이 아득하네"라고 읊으며, 현실의 제약을 넘어 자연 속에서 도를 구하고자 하는 유자의 간절한 소망을 담아냈다.
'활발하게 움직이며 맑다'라는 뜻의 제3곡 활청담(活淸潭)은 끊임없이 물이 흘러들어 맑음을 유지하는 연못의 특성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일깨워준다. 유자들은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성정(性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 또한 활발하게 깨어있어야 청정함을 유지할 수 있음을 배웠다. 정태진은 "본래의 맑은 마음 흐리게 하지 말라 / 이치가 허명하면 도는 절로 생기리라"라고 읊으며, 마음의 정화가 도에 이르는 첫걸음임을 강조한다.
'마음을 씻는 대'라는 제4곡 세심대(洗心臺)는 속세의 번뇌와 욕심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맑고 푸른 물에 씻어내는 공간이다. 자연의 조화로움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선비들의 의지가 담겨 있다. 정태진은 "부질없이 세상사에 깊이 물들었네 / 이 대에 이르러 한번 씻길 생각하니"라고 노래하며, 허명한 본래의 마음을 되찾고자 하는 간절한 다짐을 보여줍니다. 이곳에는 백거이의 구로회(九老會)에서 유래한 '구로천(九老川)'이라는 글씨도 새겨져 있어, 세속을 초월한 삶의 의미를 더한다.
'물결을 본다'라는 뜻의 제5곡 관란담(觀瀾潭)은 맹자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여울목을 본다'라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이는 드러나는 현상 속에서 그 근본을 꿰뚫어 보아야 진정한 도에 이를 수 있다는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는 곳이다. 선유구곡의 중심에 자리한 이곳에서 정태진은 잔잔한 연못 물결을 보며 도의 근원을 깨닫는 과정을 "차가운 수면 위에 내 마음 비춰보네"라고 표현했다. 이곳에는 아홉 은자의 이름이 새겨진 '구은대(九隱臺)'도 있어, 은둔하며 도를 구했던 이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특히 5곡은 주자의 무이구곡에서도 그러했듯이 반드시 구곡의 중심을 5곡으로 보았고 이곳에 정자를 건립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살피도록 했다.
제6곡 탁청대(濯淸臺)의 '탁청'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詞)'에서 유래한 말로, 맑은 물에 갓끈을 씻어 세속의 더러움을 멀리하고 청정하게 살고자 하는 선비의 결의를 상징한다. 정태진은 이곳에서 상주 출신의 선비 손재 남한조(南漢朝, 1744-1809) 선생을 떠올리며, 혼탁한 세상에 물들었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씻어내고 다시금 맑고 깨끗한 삶을 다짐하는 과정을 시로 담아냈다.
제7곡 영귀암(詠歸巖)의 '영귀'는 공자와 증석(曾晳)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관직이나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며 삶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외재는 이곳에서 "수시로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온다"라고 노래하며, 혼란한 시대 속에서도 내면의 평화와 자유를 추구했던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8곡 난생뢰(鸞笙瀨)의 '난생'은 악기 생(笙)의 아름다운 표현으로, 신선의 세계에서 연주되는 소리를 의미한다. 이곳에 흐르는 물소리가 마치 난세가 노래하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하여, 선유구곡의 극처인 신선의 세계가 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외재 정태진은 "돌 여울 물소리 난세의 노래 소리"라고 읊으며, 이 굽이에서 신선의 자취를 발견하고 도의 세계로 다가가는 감격을 표현했다. <계속>
엄원식 문경시 가은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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