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살린 것도 죽인 것도 한국군 [광복 80주년-다시 평화]

최석환 기자 2025. 8. 3.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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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군에 목숨 건진 베트남인

보티리엠 씨 죽음 문턱서 한국군 덕에 생존
일가족 모두 한국군에 학살 "나를 왜 살렸나"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보티리엠 씨 부부가 지난달 5일 오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빈토촌 자택에서 사진 없는 아버지 제단에 향초를 꽂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베트남전 참전 열사다. /최석환 기자

삶과 죽음이 넘나들던 그 날, 한국군 일부는 조용히 주민들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줬다. 소수지만 미리 도망치라 귀띔했고, 몸을 숨긴 방공호 앞에 서서 목숨을 지켜냈다. 베트남전 한복판에 뛰어든 한국군 총칼에 마을 곳곳이 만신창이가 된 학살 한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다. 그 덕에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가족을 잃고, 본인 목숨을 건진 생존자와 그 가족들은 말한다. "우리를 살린 것도, 죽인 것도 모두 한국군이었다"고.

◇나는 살고, 가족은 다 죽었다 = 보티리엠(66) 씨는 7살 때인 1966년 11월 9일 아침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프억빈촌 프억빈 학살 현장에서 죽다 살아났다. 죽음 문턱까지 닿았다가 한국군에 목숨을 건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한국군은 보티리엠 씨가 살던 마을에서 민간인 73명을 살해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노인, 여성, 아이였다. 보티리엠 씨는 외할아버지 응우옌카(당시 69), 외할머니 응우옌티당(67), 어머니 응우옌티호아(28), 여동생 보티시(1), 외사촌 언니 응우옌티냔(18) 등 같이 살던 가족 5명을 잃었다. 베트콩이었던 아버지는 따로 살다가 사건 2년 뒤 사망했다.

그날 오전 보티리엠 씨는 총성 속에 집과 10m 거리에 있던 방공호로 피신했다. 어머니, 외조부모, 동생, 외사촌 언니까지 여섯 가족이 함께였다. 베트남전쟁을 피하고자 본래 집을 떠나 외조부모 집에 피난 온 지 1~2달 정도 되던 때다.

"한국군이 왔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한국 군인들을 만나면 죽는다'라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느낌으로 알았다. 방공호에 있어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다른 곳으로 도망치자'고 했다. 돌아온 답은 '우린 일반 시민이고 죄가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다 괜찮을 거다'였다."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프억빈학살 위령비 전경. 1966년 11월 9일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프억빈촌에서 한국군이 민간인 73명을 학살했다. 주민들을 모아놓고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노인, 여성, 아이였다. /최석환 기자

◇한국군에 목숨 부지 = 몸을 숨긴 지 1시간 정도 지났을까. 낯선 언어가 들렸다. 한국어였다. 총을 든 한국군이 "나오라"고 손짓했다. 한 줄로 서라는 지시도 이어졌다. 군인 말에 가족들이 하나둘 빠져나왔다. 보티리엠 씨가 가장 마지막 순서였다. 나오자마자 앞에 서 있던 한 한국 군인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만 같은 공포감이 컸다. 얼마 안 가 움켜쥔 손을 슬며시 놓았다. 그대로 도망쳤다. 본능이었다. "아가, 이쪽으로 와"라는 엄마 말을 듣고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군인은 남의 집 마당 쪽으로 달아나는 보티리엠 씨 모습을 보고도 아무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한국 군인은 내가 도망칠 때 바로 총으로 쏴서 죽일 수도 있었다. 쐈다면 피할 수 없었다. 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 머리에서 손을 놓을 때부터 일부러 놔두는 느낌이었다. 도망치다 총소리를 들었다. 순간 직감했다. 가족들이 살해당했다는 걸. 도망치기 직전에 봤던 가족 모습이 생전 마지막이었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보티리엠 씨가 지난달 5일 오전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선사 자택에서 수류탄 파편상을 입은 곳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최석환 기자

◇총상 피하고 수류탄 파편상 = 보티리엠 씨는 한국군 덕에 총상을 피했지만, 또 다른 한국군이 던진 수류탄에 파편상을 당했다. 파편이 이마와 무릎에 박혔다. 지금도 눈썹 위에는 제거하지 못한 파편이 남아있다. 지금도 부상 후유증을 달고 산다. 날씨가 변할 때면 통증이 극심하다.

보티리엠 씨가 손으로 다친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다친 곳은 오른쪽 눈썹 위와 왼쪽 무릎까지 두 곳이다. 눈썹 위쪽은 만지면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든다. 날씨 변화에 따라 쑤시는 느낌이 심해진다. 가끔은 건들 수 없는 정도로 아프다."

그는 이마 쪽 파편을 제거하면 실명할 수 있다는 진단에 손도 쓰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릎에 박힌 수류탄 파편은 제거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마 쪽을 아무도 건들지 못했다. 형편이 좋지 않아 추후 병원진단을 제대로 받아본 적은 없다."

보티리엠 씨는 부상 후유증과 함께 가족을 잃고 나서 전쟁고아로 살아갔다. 친척 집과 남의 집을 전전했다. 남의 집 아이를 돌보며 생계를 유지했다. 힘겹게 살다 1982년쯤 결혼해 독립해 딸 넷을 낳았다. 그는 매일 아침 집 안 내부에 마련된 사진 없는 아버지 제단에 향을 피운다.

보티리엠 씨에게는 늘 가시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그때 왜 그 군인은 나를 살렸을까'다. "머리채를 잡힌 기억과 잡혔을 때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죽기 전에 그 군인을 꼭 만나서 물어보고 싶다. 누군지 몰라도 살아있다면 말이다. 죽기 전에 꼭 대화하고 싶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응우옌티홍 씨가 지난달 5일 오후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남중사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최석환 기자

◇방공호 앞 지킨 한국군 = 응우옌티홍(71) 씨는 한국군에 오빠 목숨을 구했다. 반대로 한국군에 어머니, 외할머니, 동생 3명을 잃었다. 이 때문에 보티리엠 씨처럼 한국군만 떠올리면 양면적인 감정이 교차한다.

응우옌티홍 씨는 1968년 2월 24일 꽝남성 디엔반시 디엔즈엉구 하미마을에서 민간인 135명이 숨진 하미학살 사건 피해자다. 그는 당시 14살이었고 친할아버지, 사촌 오빠와 집안 제단 빈 곳에 숨어 생존했다.

응우옌티홍 씨는 학살 사건 전 한국군과 주민 사이에 관계가 좋았다고 기억한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군인들이 하미마을을 찾아 쌀, 초콜릿, 과자 등을 나눠줄 정도였다. 그의 오빠 역시 마을을 찾는 한국군과 관계가 좋았고, 친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날 한국 군인들이 주민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사건 당일 오빠랑 동생 1명은 물소를 데리고 논에 갔었는데, 친한 한국군이 '돌아가면 죽을 수도 있으니 방공호로 내려가라'고 했다고 들었다. 같이 있던 동생은 무섭다며 달아났다가 목숨을 잃었다. 가족이 죽은 것도 한국군 때문이었지만, 오빠는 한국군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해당 군인이 오빠를 방공호에 밀어 넣고서 다른 한국군이 진입하지 못하도록 입구에 서 있기도 했다고 전했다. "어느 정도까지 서서 지켜준 건지는 모르겠다. 앞에 서서 군인들이 철수할 때까지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오빠 한 명만 구해줬다. 이미 주민들은 다른 곳에 모인 상태였다. 동생도 안 도망쳤다면, 엄마한테 가지 않았다면, 살았을 거다."

응우옌티홍 씨는 그 한국군에 고마운 마음이 크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꺼냈다. "오빠를 살려준 한국군이 살아있다면 고맙다는 말을 대신 꼭 전하고 싶다. 그래도 오빠를 살려준 군인은 양심이 있었다. 끝까지 우리 오빠를 지켜줘서. 일부러 방공호로 오빠를 밀어 넣어줘서 고마운 마음이 크다. 친오빠가 그렇게 살아남고도 1980년대 들어 30대 젊은 나이에 간암으로 사망한 게 안타깝다."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 응우옌티홍 씨가 지난 5일 오후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남중사 자택에서 "앞으로 전쟁은 다신 없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석환 기자 

◇사람 죽이는 전쟁, 다신 없어야 = 응우옌티홍 씨는 자신과 같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더는 나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러려면 다신 전쟁이 없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이든 베트남이든 총소리가 안 들려야 한다. 후세를 위해서라도.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정부가 노력하면 좋겠다. 후세들은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간절하게 원한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도 했다. "고통은 여전하다. 한이 어떻게 가실 수 있겠나. 총소리가 너무 무섭다. 전쟁이 남긴 고통은 우리가 다 겪었으니 더는 겪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추가로 던지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정부와 시민이 하나 돼야 민간인 학살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니겠나.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진짜 끔찍하다. 더는 아프게 살지 말자.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최석환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