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신문물·문화 수용… 민족의식 자각하고 독립운동 나서
(26)독립운동 명문가 청주 고령신씨 문중
신홍식 목사·신백우·신형호 등 다양한 항일운동
신규식 신건식 형제는 자녀 등 일가족 독립 앞장서
문동학교·덕남사숙 등 교육시설 세워 후손 가르쳐

충북 청주의 고령 신씨 문중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청주지역의 고령 신씨 독립유공자만 해도 신규식 신채호 신백우 신홍식 신건식 등 16명에 이른다.
◇충북 청주의 고령 신씨 문중

충북 청주시 낭성 가덕 미원면 일원에는 16세기 초부터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이 세거해왔다. 청주 상당산성 동쪽에 산다 하여 '산동 신씨'라고 불렀다. 이 문중은 19-20세기 일제와 서구 여러 나라가 물밀 듯이 한반도에 들어오던 시기 매우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대응에 나선다.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여 새로운 문물을 적극 받아 들이기로 한 것이다. 문중에서 특별히 주목한 것이 교육이었다. 신규식 신채호 신백우 등이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은 서울에서 신학문을 배우면서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자각하고 민족 계몽과 교육, 민권 운동을 벌이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강점기 청주의 고령 신씨 문중이 벌인 교육운동도 눈길을 끈다. 문중에서는 1905년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영천학계를 조직했다. 지역에 사립학교를 세우기 위한 계(契)로 설립 취지문에 국가의 치란과 존망, 민족의 문명과 야만 및 성쇠가 교육의 흥폐에 있다며 원근과 노소를 따지지 말고 빨리 건물을 지어 교육을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취지로 1907년 문동학교를 세웠다. 수업 연한은 4년, 학생은 48명이었으며 논어나 수신 같은 유교적 과목은 물론 위생 국어 일어 산술 도서 등 13과목을 가르쳤다. 이 학교가 폐교된 뒤 1914년에 덕남사숙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고령 신씨 문중의 이러한 근대 교육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에 눈을 뜨고 시대적 과제를 인식하게 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령 신씨 문중의 세 천재로 유명했던 '산동 3재' 신규식 신채호 신백우는 신문물과 신문화를 접한 뒤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예관 신규식은 관립한어학교와 육군무관학교를 나온 뒤 애국계몽운동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틀을 세웠다. 단재 신채호도 언론과 저술을 통한 항일운동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에도 참여하고, <조선상고사> 등 자주적 주체적 민족사학을 내세워 독립운동을 벌였다.


경부 신백우는 측량과 외국어(일본어), 법학을 배웠고, 신민회의 외곽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와 대동청년당에서 활동하다 1911년 만주로 망명, 봉천에서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 위해 힘썼다. 1918년 조부가 별세하자 귀국, 한성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일제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로 다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서로군정서 참모부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에 귀국했고, 한동안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대부터는 고향에서 농촌운동과 고령 신씨 문중 사업에 힘썼다.
신규식의 딸 신명호도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어머니 조정완을 따라 아버지가 있는 중국으로 망명, 이듬해 민필호와 결혼하였다. 민필호는 신규식의 비서, 임정 외무차장,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신명호도 1941년부터 통합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부부의 아들 민영수와 딸 민영주도 독립유공자이다. 민영주의 남편이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이다.

신규식의 동생 신건식도 평생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1년 형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 항주의약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신규식이 설립한 동제사와 대동보국단에서 활동했다. 중국군 항주군의학교의 외과 주임을 일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왔다. 임정의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일했고, 임정 재무부차장을 맡아 재정확보에 노력했다.
신건식의 아내 오건해도 독립운동가이다. 1926년 딸 신순호를 데리고 상하이로 망명,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38년 5월 남목청 사건 때 총격으로 중상을 입은 백범 김구를 회복을 도왔다. 충칭에서 창립된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에 참가했다. 신건식의 딸 신순호도 독립지사이다.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항일 운동을 벌였고, 1940년 한국광복군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와 외무부 정보과에서 일했다. 신순호의 남편 박영준도 중국중앙군관학교를 나와 광복군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이다. 그의 부친이 외교 전문가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으로 활동한 박찬익이다.
신형호(申衡浩)는 신규식의 형 신정식(申廷植)의 아들로 신해혁명 지원 조직인 중화학생군단에서 일하다 신규식의 권유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부터는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에서 활동했으며, 여러 애국단체에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기부했다. 1921년에는 이승만 이용직 정한경 등과 비밀결사체인 대광단을 조직하였다.

신홍식 목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이름을 올린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9년 2월초 남강 이승훈으로부터 3.1 독립선언에 참여해달라는 권유를 받고 곧바로 수락했다. 자신이 일하던 평양지역 감리교회 목사들과 함께 지역 차원의 만세운동을 도모했고, 3월 1일 당일 서울의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일경에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신형호(申 金+榮 浩)는 가덕면 인차리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당시 경성중앙학교 학생으로 독립선언서를 갖고 내려와 청주농업학교 학생들과 만세운동을 추진했다. 독립선언문을 제작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신경구 신학구 신성휴 신정식(申鼎植) 등은 1919년 3월 30일 청주군 미원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특히 신경구는 고령 신씨 집안 호족 좌장의 직계 후예로써 문중의 재산으로 신규식의 독립투쟁을 도왔다. 중국으로 망명, 항일운동을 벌였고, 1932년 쌍성보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뒤 1948년 중국에서 순국했다.
신형식과 신흥구는 1920년 지역의 이종만 유영창 한병호 등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기로 하고 비밀결사체인 평양결사단 청주지부를 조직했다. 가짜 권총으로 지역 부자들을 위협, 군자금을 모으려다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신흥구는 도피해 체포를 면했다.
신인호는 북일면 구성리 출신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 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경위대 소속으로 임시정부 요인 경호를 담당하였다.
전국적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문과 집안이 꽤 많다. 서울의 우당 이회영 형제는 모든 재산을 팔아 만주로 집단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경북 안동의 석주 이상룡 가문과 구미의 왕산 허위 가문은 사돈 관계로 두 집안에서 수많은 독립지사를 배출했다. 안동의 김동삼 김대락 집안도 여럿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벌였고, 황해도의 안중근 집안도 안정근 안공근 안춘생 등 애국지사가 줄줄이 나왔다.
청주의 고령 신씨 가문은 천안의 유관순 열사 집안, 아산의 이순신 장군의 덕수 이씨 문중과 더불어 충청권은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불후의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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