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보다 더 강포한 미국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5. 8. 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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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건륭제(왼쪽)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퍼플렉시티]
조선 지식인들은 청이 중원을 차지한지 100년이 지난 시점에도 망한 명나라를 흠숭하고 청나라에는 겉으로는 조아리면서 속으로는 오랑캐라 경멸했다. 임진의 난 때 명나라 신종 황제가 사재까지 털어 조선을 구원했고 이때 무리하는 바람에 명이 망했다고 미안해했다. 재조지은( 再造之恩)! 청은 명을 망하게 한 것 외에도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씻지 못할 치욕을 조선에 안긴 원수의 나라였다. 그런데…

관련 연구자들은 청이 조선을 대한 태도가 명보다 훨씬 온후 관대했다고 본다. 특히 조선에 오는 칙사들의 태도가 그랬다.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에 올때마다 한 주머니 따로 챙기느라 바빴다. 오만무례했고 조선의 왕을 아랫사람처럼 대했다. 청의 칙사는 기율이 있었다.건륭제는 1763년 조선이 칙사에게 제공하는 예물의 양을 절반 줄이라 명령했다. 조선에서 돌아오는 칙사가 산해관을 지날 때 불시 검문해서 보따리 검사를 하게 했다. 규정외 물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 모가지였다. 홍대용은 1766년 저서 ‘담헌서’에서 “청이 명보다 훨씬 관대하고 친절하다”고 썼다.

1780년 피서지 열하에서 자신의 70세 생일을 경축하러 온 조선 사절단을 맞은 건륭제는 “번봉(藩封)중에 조선이 제일 공손하고 정성스럽다. 앞으로는 정공(正貢)만 받을 테니 다른 예물은 안 해도 된다”고 하교한다. 조선이 청에 보낸 사신은 매년 정기적으로 보내는 절행(節行), 조문 등 특별한 목적으로 파견하는 별행(別行)으로 구분되는데 황제 생일에 맞춰 파견하는 성절사는 절행중 하나였다. 절행때는 관행대로 공물을 받겠지만 별행은 따로 공물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니 큰 배려다.

조선국 사신은 감격에 겨운 글을 중국 예조에 올렸다(조선의 왕도 중국 황제에게 친전으로 편지를 보낼 수 없었다). “삼가 황상의 만수절을 당하여 구역(九域)에 경사가 넘쳐흘러 본국으로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변변치 못하나마 진하(進賀)하는 정성을 본받았던바 이에 격외(格外)의 은상(恩賞)을 특별히 소방(小邦, 조선)에 내리시니…” 사신단의 일행이었던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조선을 배려하는 건륭제의 마음 씀씀이를 깎아내릴 이유는 없지만 “앞으로 정공만 받겠다”고 한데는 경제적 이유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조공체제의 기본 원리는 받은 만큼 주는 데 있다. 조선이 공물을 바치면 청은 상응하는 값어치만큼 조선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권위가 서지 않고 중화의 안정된 세계가 작동할 수 없다.

이 조공 경제가 청에게 결코 ‘남는 장사’가 아니었다고 보는 연구자 중 한명이 미국 델라웨어대학교 왕위안충 교수다. 그에 따르면 조공은 봉건의 질서를 확인하는 상호 부담 행위로 착취와는 거리가 멀었다. 조선에서 공물을 보내오면 그만큼 중국의 물자(경제적으로는 훨씬 중요한)가 빠져나간다. 그러니 정기 공물만 하라는 건륭제 지시는 ‘기본 예의만 차리고 허례허식으로 인한 낭비는 피합시다’라는 실용적 제안의 의미가 있다.

몇 년 전 열하일기를 처음 읽을 때는 대청 외교 관련 기술이 썩 편안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때 중국의 속방이었던 나라의 후예로서 느끼는 콤플렉스가 내게는 있다(극복한 사람도 많겠지만). 중국을 상전으로 모시는 조상의 굴신을 읽으며 일말의 치욕감이 없다면 거짓이다. 한국인이 느끼는 반중 감정은 현대 중국의 난폭함에 영향받은 바 크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에도 닿아 있다. 우리가 당당하지 못하고 비굴했던 시절을 자꾸 상기시키므로 불편한 것이다.

열하일기에서 불편했던 부분을 어제오늘 다시 찾아 읽고 있다. 미국이 이번에 한국 관세협상단을 대하는 것을 보고 ‘250년 전과 지금이 뭐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국제관계는 힘이 본질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본질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지난 100년간 세계가 이룩한 근사한 진보 중 하나가 형식상의 만국 평등주의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지만 실질이 아니라 형식상의 평등이다. 국가간 상호 존중의 에티켓 말이다. 종교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서양이 수백 년 동안 발전시킨 외교의 기본문법이 그것이고 동양은 이를 기꺼이 수용했다. 내가 열하일기를 읽으며 불편했던 것은 내 조상과 달리 형식상 평등주의가 상식인 시대에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위대한 헨리 키신저도 이걸 서양의 공헌으로 자랑스럽게 쓰곤 했다.

그러나 쥐뿔이 위대한가. 그 대단한 서양의 공헌은 트럼프 재집권 반년 만에 신기루처럼 날아갔다. 세상은 다시 베스트팔렌 이전으로 돌아갔다. 1780년 조선사신단을 대하는 건륭제와 2025년 7월30일(현지 시각) 백악관 집무실에서 한국 관세협상단을 맞는 트럼프를 비교해 보라. 누가 더 황제 같은가. 트럼프는 그날 소셜미디어에 올린 협상 타결 메시지에서 이재명 대통령 당선을 축하한다고 했다. 4500억 달러짜리 책봉 승인…

미국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미국은 지금 제국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 힘으로 치면 역대 제국중 최강에 속한다. 많이 쇠약한 게 이 정도다. 그점에서 청보다 미국이 더 제국스럽다. 그런데 갖추지 못한게 하나 있다. 제국의 매너! 건륭은 박지원 일행의 열하 당도가 늦어지자 타국 사신단이 모두 도착했음에도 연회를 연기했다(속번 중 조선의 비중이 큰 탓이었다). 화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이 제일 모범’이라면서 상을 내렸다. 건륭처럼 우리한테 잘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건륭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우아했다. 트럼프는 ‘자, 입금 확인됐으니 물건 보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업자같다.

제발 자꾸 그게 세상의 본질이라 말하지 말라. 당신만 인생산 게 아니다. 우아하게 세상이 돌아가게 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값이면 그런 사람이 이끄는 세상이 살 만한 세상이다. 사실 그건 같은 값일 수가 없다. 오랜 세월, 비싼 대가를 치러 가며 쌓은 우아한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노원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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