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탁해도 무너지지 않아 [.txt]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 못 하는 성격
도움 요청은 내 부족함 드러내는 일
수치심 없이 도움받는 경험도 필요

저는 부탁을 어려워하는 성격입니다. 빌려달라는 말도 못 합니다. 빚지는 기분이 싫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 버스카드가 든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게 싫어서 4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 집에 왔습니다. 멀다면 먼 길이겠지만 못 걸을 거리도 아니라서 돈을 빌리는 것보다 걷는 게 더 편했습니다.
또 기억나는 순간이 숙제를 까먹고 못 한 날입니다. 완전히 잊고 있다 수업 직전이 되어서야 생각났습니다. 늘 그랬듯 숙제를 못 해 온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 정신없이 다른 사람의 숙제를 베꼈습니다. 저도 그렇게 했다면 충분히 숙제를 낼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냥 혼나는 걸 택했습니다. 선생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친구가 한 숙제를 제가 한 것인 양 행세하는 것은 비양심적인 행동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할 수 있는 것들은 스스로 하고,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것이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에게 아무렇지 않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고 부러우면서도 괜히 화가 납니다. 가령 수업을 빠져놓고 필기를 빌려달라고 하는 친구들이요. 저도 아파서 수업을 빠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기에게 필기를 빌리는 대신 학교 게시판에 글을 올려 돈을 주고 필기를 샀습니다. 그런데 놀러 가느라 수업을 빠져놓고도 남의 필기를 빌리는 친구들을 심심찮게 봅니다. ‘대학생이나 되어서 창피하지도 않나?’ 생각이 드는데 정작 부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렇지 않아 보입니다. 그만큼 둘이 친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스스럼없이 뭔가를 부탁할 수 있는 친구가 없습니다. 사람들도 저에게 뭘 부탁하지 않습니다. ‘필기 빌려주기 싫은데 저런 부탁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외톨이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송아영(가명·22)
그림책 ‘내가 다 열어줄게’에는 ‘열기 대장’을 꿈꾸는 어린아이가 등장합니다. 낑낑거리며 작은 초콜릿 포장지를 뜯어보려 하지만 결국 엄마 손을 빌릴 수밖에 없는 웅이는 얼른 커서 모든 것을 열 수 있길 꿈꿉니다. 열쇠가 사라진 은행 금고도 뚝딱 열고, 동물이 갇혀 있는 우리도 열고, 도둑의 가방도 활짝 열어서 경찰을 돕는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열기 대장이 되고 싶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물건을 열어달라며 웅이 앞에 끝도 없이 줄을 서는 꿈, 웅이가 마법처럼 물건들을 열 때마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꿈도 꿉니다.
한껏 부풀어 오른 웅이의 꿈은 현실 앞에서 맥없이 바람이 빠집니다. 아직 힘도 요령도 부족해 혼자서는 열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아빠에게 주스를 열어달라고 내밀며 “나는 아무것도 열 수 없어”라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웅이의 모습은 환상 속 웅대한 웅이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 짧은 그림책은 독립과 의존 사이의 힘겨운 내적 사투를 보여줍니다. 어떤 도움 없이도 모든 것을 척척 해내고 싶지만 여전히 할 수 없는 것이 많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것은 좌절스러운 경험입니다. 수치스럽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아영님도 수치심과 두려움을 감당하는 것이 어려워 도움받는 것을 피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영님에게 있어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조건을 통과해야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수업을 갈 수 없을 정도로 아팠을 때’에만, ‘정당한 값’을 치러야 받을 수 있는 필기처럼요. 충분하고도 합당한 이유나 대가 없이 도움을 받는 것은 아영님에게 그저 빚입니다. 노력도 하지 않고 원하는 것만 얻어 가는 뻔뻔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도움받는 것을 마치 도둑질과 흡사하게 여기는 모습을 통해 아영님이 도움받는 것을 그동안 얼마나 금기시해왔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아영님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기인하는 독립은 고립에 가깝습니다. 의존이 두려워서 혼자 있는 쪽을 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내게 모자람이 있더라도 내 존재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자존감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비웃지 않을 것이라고 타인을 신뢰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의존을 마냥 어리고 미숙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의존은 이런 선결 과제들을 필요로 합니다. 아영님이 망설임 없이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보며 부러움을 느낀 것도 그 친구들에게서 방어적인 자기 과신이 아닌 건강한 자존감, 두려움 없이 자신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신뢰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아영님에게 의존이 허락되는 경험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림책에서 웅이의 아빠는 “아무것도 열 수 없다”며 의기소침해진 웅이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의 얼굴 앞에 과자를 내밀어보라고 합니다. 웅이가 과자를 내밀자 아빠의 입이 쩍 열립니다. 아빠의 반응을 통해 웅이는 아직 열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지만 아무것도 열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전능하지 않은 것이 곧바로 무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며 현실적인 자존감을 회복합니다. 웅이의 부족함을 외면하지도 조롱하지도 않는 아빠에게 더 많이 의존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진정한 독립을 준비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아영님에게 필요한 것도 수치심 없이 도움받는 경험,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경험 그 자체일 것 같습니다.

박아름 심리상담공간 숨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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