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축구, 세계 축구의 ‘핫 키워드’…그런데 한국은? [경기장의 안과 밖]
1999년 로스앤젤레스 로즈볼 스타디움. 여자 축구 월드컵 결승전에서 미국과 중국이 승부차기 혈투를 벌였다. 미국의 브랜디 채스테인이 마지막 키커로 나섰다. 그가 넣으면 미국 여자 축구는 월드컵 첫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채스테인이 때린 킥은 중국 골망을 세차게 흔들었다. 9만 관중 앞에서 채스테인은 유니폼 상의를 벗어젖혀 검은색 스포츠 브라 차림으로 환호했다. 여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1세기 들어 세상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인류 역사를 독점했던 남성우월주의는 페미니즘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각종 마이너리티 차별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또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미투 운동’ ‘블랙 라이브스 매터(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캠페인 등 사회적 요구는 전 세계 공통의 가치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정부·기업·언론매체 가릴 것 없이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 코드가 새로운 기준으로 우리 일상에 정착 중이다. 〈인어공주〉 배역에 흑인 배우가 기용되었다. 여배우, 여의사, 여검사 등 성별을 구분하는 용어도 언론보도에서 퇴출 수순을 밟고 있다. 2022년 카타르월드컵 개막식 공연에는 꼬리퇴행증후군 장애를 지닌 가수 가님 알 무프타가 등장했다.
이런 물결 속에서 세계 축구계도 헤엄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여성 스포츠와 참여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간판 프로그램인 〈매치 오브 더 데이(Match of the Day)〉에 여성을 적극 기용하고 있다. 진행자뿐 아니라 중계·해설·패널 등 프로그램 제작 전반에 여성이 투입된다. 서구권 언론 보도에서는 의도적으로 여자 축구의 보도 비중을 높이는 추세다. ‘아스널,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기사 제목을 클릭해서 들어가면, 당당하게 지면을 차지한 여자 축구선수들의 사진을 볼 수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도 여자 축구대회 프로모션에 진심이다. 여자 축구 월드컵은 1991년 첫 대회를 치렀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와 뉴질랜드가 공동 유치한 2023년 여자 축구 월드컵이 아홉 번째 대회였다. 남반구에서 처음 열린 호주·뉴질랜드 여자 월드컵만 봐도 여자 축구가 얼마나 대단한 시장 경쟁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FIFA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여자 축구 월드컵의 전 세계 TV 누적 시청자 수가 20억명을 돌파했다. FIFA가 책정한 대회 예산은 4억3500만 달러(약 6018억원)였는데 TV 중계권과 스폰서십, 티켓 판매 등으로 벌어들인 최종 매출액은 5억7000만 달러(약 7885억원)에 달했다.

상금 규모도 빠르게 증가했다. 2015년 대회에서 1500만 달러, 2019년에 3000만 달러였는데, 2023년 대회에서만 총상금이 1억1000만 달러(약 1521억원)였다. 여기에 FIFA는 32개 출전국 협회와 선수들의 소속 구단에 대회 준비 및 보상으로만 총 4200만 달러(약 581억원)를 지급했다. 2027년 브라질에서 열리는 여자 축구 월드컵에서 FIFA는 매출 목표액을 ‘10억 달러 이상’으로 잡았다.
이런 지표를 접하는 독자 중에는 ‘여자 축구를 누가 봐?’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른다. 국내는 몰라도 소위 축구 선진국에서는 여자 축구가 빠르게 인기를 얻고 있다. 앞서 소개한 2023년 호주·뉴질랜드 여자 축구 월드컵은 한 대회에서만 관중 197만명을 모았다. 현재 스위스에서는 여자 유로가 진행 중이다. 국내 언론에선 보도하지 않는 탓에 대회 자체를 아는 팬이 거의 없다. 조별리그 일정이 마무리된 7월14일을 기준으로 평균 관중이 1만9233명을 기록 중이다. 올 시즌 흥행이 잘 되고 있다며 자찬하는 K리그의 평균 관중(1만342명)보다 두 배 가까이 많다. 앞으로 토너먼트 단계가 시작되므로 2025년 여자 유로의 평균 관중은 2만명을 넘길 게 확실하다. 대회가 거듭될수록 평균 관중 수가 느는 추세가 더 중요하다. 여자 유로의 평균 관중은 2017년 대회에서 7969명, 2022년 대회에서 1만544명을 기록했다. 티켓 판매가 늘어나면 TV 중계권과 스폰서십 수입도 연동된다.
여자 클럽 축구계의 최고봉은 ‘FC 바르셀로나 페메니’다. 현재 여자 유로에 출전 중인 스페인의 알렉시아 푸테야스와 아이타나 본마티가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4년 연속 여자 발롱도르를 수상하고 있다. 바르셀로나 여자 팀의 흥행은 놀랍다. 2021-2022시즌 여자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는 독일의 강자 볼프스부르크를 상대했다. 이날도 푸테야스와 본마티가 득점포를 가동해 5-1 대승을 거뒀다. 홈경기장 캄노에서 집계된 관중 수가 무려 9만1648명이었다. 바르셀로나는 2023-2024시즌에도 결승전에 올랐고, 프랑스 강호 올랭피크 리옹을 2-0으로 제치고 대회 4연패를 달성했다. 빌바오의 산마메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결승전은 관중 5만827명을 기록했다. 눈치가 빠른 독자는 손흥민의 토트넘 홋스퍼가 지난 5월 UEFA 유로파리그를 제패한 바로 그 경기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토트넘과 맨유의 결승전 관중 수는 4만9224명이었다. 어라?
여자 축구를 누가 보냐고?
여자 축구는 전 세계 곳곳에서 활약 중이다. 미국은 2016년 앨릭스 모건, 호프 솔로, 메건 라피노(2019년 발롱도르 수상자) 등 스타들이 모여 미국축구협회를 상대로 남녀 국가대표팀의 보상 차등 지급에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2022년 연방법원의 명령으로 미국축구협회는 국가대표 경기 및 각종 대회 출전에서 이루어지던 남녀 임금 차별을 폐지했다. 현재 미국의 ‘내셔널 위민스 사커 리그(NWSL)’는 1부 14개 팀으로 운영되는데, 경기당 평균 관중 1만1235명을 기록 중이다. 인기 팀 샌디에이고 웨이브의 평균 관중은 1만9575명에 달한다. 여자 축구 강국인 일본도 1989년 일찌감치 여자 실업리그를 출범했고, 2021-2022시즌부터 완전한 프로리그인 ‘WE리그’를 창설했다. 최근 들어 관중 감소로 일본 내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곤 있지만, 인기 팀 산프레체 히로시마 레지나는 경기당 5000명 이상 관중을 모으고 있다. J리그 구단들이 자체적으로 여자 팀을 운영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2024-2025시즌부터 여자 챔피언스리그를 출범시켰다.
여자 축구의 세계적 흐름에서 한국은 한참 뒤떨어진 상태다. 2009년 시작한 WK리그는 현재 8개 팀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팀이 열악한 환경을 벗어나지 못한다. 홍보는커녕 경기 일정과 결과를 찾아보기도 어렵다. 선수의 출전 정보는 연맹이나 구단에 직접 문의해야 겨우 알 수 있다. 알리지 않으니 관중이 있을 리 없다. WK리그 8개 팀 중에서 돈을 받고 티켓을 파는 곳은 수원 FC 위민뿐이다. 2024년 11월에는 한국여자축구연맹이 WK리그 운영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가 대한축구협회의 지원금 확대를 약속받고 결정을 철회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대학교를 포함한 학원 여자 축구부가 50개도 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절반 이상이 대학 또는 프로에 진출할 정도로 인력난이 심각하다.
2024년 UEFA 여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의 푸테야스는 쐐기골을 터트린 뒤 ‘상의 탈의’ 셀러브레이션을 펼쳤다. 1999년 채스테인과 달리 푸테야스의 스포츠 브라는 화제조차 되지 못했다. 세상이 변했다는 뜻이다. 세계 스포츠계에서 여자 축구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뉴 마켓’이다. FIFA와 AFC도 회원국들의 여자 축구 투자를 금전적으로 지원하면서 적극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여자 축구는 이런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다. 세상 변하는 줄 모르는 후진국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축구협회는 지금이라도 눈을 떠야 한다.
홍재민 (축구 전문기자·레드재민tv 운영)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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