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려말 왜구 격퇴의 전설, 광주 경열로의 주인공 정지 [도로명 속 남도역사인물]

노성태 2025. 8. 2.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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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 경열사(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광주의 도로명 중 인물을 기리는 도로명이 42개나 된다. 이 중 35개는 '충장로' 등 '로'이고, 7개는 '서서평길' 등 '길'이다.

35개의 '로' 중 경열로는 고려 말 왜구 격퇴의 영웅, 고려 수군의 창시자인 나주 출신 정지 장군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도로명 '경열'은 정지 장군이 받은 시호다. 서구 농성동에 있는 서구보건소 앞 사거리부터 북구 신안동 광주역 앞 교차로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왕복 6~8차로의 도로이다. 총연장 2,900m인데, 이 중 6차로는 1,353m이고, 8차로는 1,547m이다.

도로 위 주요 건물 및 시설로는 서구청과 보건소, 광주은행 농성동지점, 한국전력공사 서광주지사, NC백화점 광주역점 등이 있다.
정지 장군 영정

#정지가 올린 수전의 계책

왜구 격퇴의 전설이 된 수군 창시자 정지는 1347년(충목왕 3) 나주에서 정리(鄭履)의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하동이고 초명은 준제(准提), 시호는 경렬(景烈)이다. 약관의 나이인 20세에 과거에 급제한 그에 대해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용모가 크고 훌륭하였으며 성품이 너그럽고 후하였다. 어려서 큰 뜻을 품어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대의에 통달하여 이를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도 잘했다. 출입할 때마다 항상 서적을 가지고 다녔다." '고려사'의 위 기록은 정지가 문무를 겸비한 선비 출신의 장수, 즉 유장(儒將)이었음을 보여준다,

정지가 오늘 왜구 토벌의 명장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1374년(공민왕 23) 위사(衛士)였던 유원정의 추천에서 시작된다. 이 무렵 고려의 가장 큰 근심은 왜구의 침입이었다. 당시 정지는 왕의 숙위를 담당하는 속고치(速古赤) 소속의 중랑장이었다. 속고치는 임금의 곁에서 시중드는 일을 맡은 기관을 말하는데, 시종이라는 뜻의 몽고어를 음역한 것으로 원의 지배하에서 생겨난 관청이었다.

당시 검교중랑장 이희가 왜구 격퇴를 위해서 '수전(水戰)을 익혀야 한다'는 계책을 올린다. 이를 본 공민왕은 "이희는 초야에 묻힌 신하이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 계책을 올리는데 백관(百官, 모든 벼슬아치)의 위사들 가운데 일찍이 이희와 같은 자가 한 사람도 없는가?"라며 탄식한다.

이때 위사 유원정이 마침 공민왕을 호위 중이던 중랑장 정지를 추천한다. 공민왕이 그에게 대책을 묻자, 정지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왜구에 대한 전략이 적힌 글을 꺼내어 바친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희를 양광도 안무사, 정지를 전라도 안무사 겸 왜인추포 만호로 임명한다. 고려 후기 이희와 정지에게 내린 안무사(安撫使)는 지방에 소요나 변란이 일어났을 때 파견된 임시 관직이었다.

정지와 이희는 2~3회에 걸쳐 공민왕에게 수십조에 달하는 전략을 올리는데, 핵심은 "깊은 육지의 백성들은 배를 부리는데 익숙하지 못하니 왜구를 막기 어렵습니다. 다만 바다 섬에서 성장하였거나 스스로 수전을 요청하는 자만 서명을 받아서 신 등에게 그들을 거느리게 한다면 5년 이내에 바닷길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였다.

수군 총사령관, 해도 도원수
기념물로 지정된 정지 장군 무덤(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1374년(공민왕 23) 당시 명장이던 최영의 왜구 격퇴 전략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패기를 보여준 정지의 진가는 공민왕을 이은 우왕 대에 빛을 발한다. 연전연승했던 정지 장군의 왜구 격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예의판서로 재직 중이었던 1377년(우왕 3) 6월, 왜구가 순천·낙안 등지를 침략하자,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적을 격파해 18명의 목을 베고 3명을 사로잡는다. 우왕은 정지에게 안마(鞍馬)와 나견(羅絹)을 내린다. 그리고 동년 12월에도 왜구를 공격하여 40여 명의 목을 베고 2명을 사로잡는다.

이듬해인 우왕 4년 10월, 왜구가 영광, 광주, 동복 등지를 침략해 오자, 정지는 도순문사 지용기 등과 함께 옥과현까지 추격, 미라사에 들어간 왜구를 공격하여 죽이고 말 100여 필을 노획했다. 승첩을 보고하자 정지와 지용기에게 각각 은 50냥을 하사한다. 동년 11월 왜구가 다시 담양현을 침략했으나, 정지와 지용기가 격파해 17명의 목을 벤다. 이 공을 인정받아 정지는 정3품 벼슬인 전라도 순문사에 임명된다.

1383년(우왕 9) 5월, 정지는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 목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적선 120척이 경상도 연해에 출몰한다. 당시 합포(合浦, 마산) 원수 유만수가 긴급함을 알리자, 밤낮으로 행군을 독려하여 관음포에 도착한다. 정지가 진격하여 크게 깨뜨리고 적선 17척을 불사른다. 정지의 대승이었다. 이 전투가 최영의 홍산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최무선의 진포대첩과 더불어 4대 대첩이라 불리는 관음포대첩이다. 이후 정지는 수군 총사령관 격인 정2품 품계인 해도 도원수 겸 양광·전라·경상·강릉도 도지휘사에 임명된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그의 마지막 승리는 남원전투였다. 1388년(우왕 14) 8월, 왜구가 함양에서 운봉의 팔라현을 넘어 남원에 이른다. 도원수 정지는 도순문사 최운해, 부원수 김종연 등을 독려하여 왜구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노획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번 전투에 이기지 못했다면 3도의 백성은 거의 다 죽었을 것이다"며 안도했다고 한다.

고려 수군의 총사령관이 된 정지에게 왜구 격퇴는 필생의 과업이었다. 왜구 근심을 영원히 제거하는 전략으로 정지가 제시한 것은 왜구의 근거지 대마도와 일기도의 정벌이었다. 정지의 건의는 2년 후인 1389년(창왕 1)과 1396년(태조 5), 1419년(세종 1)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왜구 침입도 마무리된다.

왜구 격퇴의 명장 정지, 그는 전쟁터에서 숱한 전공을 남긴다. 그러나 중앙 정계에서는 예의판서나 문하평리, 지문하부사 등 고위 관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중앙 관직에 있으면서 조선 왕조 개창의 핵심 인물인 조준 등과 벗으로 사귀고 있었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에는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는 위화도 회군 2등 공신에 선정되고 있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지 장군이 착용한 갑옷(광주역사민속박물관)

# 잠수함 '정지함' 건조

왜구 격퇴의 전설이 된 해도 도원수 정지, 그는 고려 말기인 창왕과 공양왕 대에 정치적인 사건인 '김저의 옥'과 '윤이·이초의 옥'에 휘말리면서 뜻밖의 시련을 겪는다. 그러나 대성(臺省)과 형조(刑曹)는 "정지가 연좌되어 죄를 받은 것은 사실 무고"라고 하여 석방한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의 공로를 기려 2등 공신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녹권과 토지 50결도 하사한다. 정지의 명예가 회복된 것이었다.

정지가 겪은 말년의 시련은 의문스럽다. 그는 역성 혁명파였던 조준과 친구 사이였고, 위화도 회군 직후에는 윤소정이 이성계에게 혁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인 '이윤·곽광의 고사'를 바치게끔 도와주기까지 했다. 실제 그는 무고로 방면되었고, 위화도 회군의 공을 인정받아 2등 공신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말년에 '김저의 옥' 및 '윤이·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유배를 간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군부 내에서 정지의 영향력을 없애려는 이성계 최측근의 정치 술수는 아니었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

나주 출신인 정지가 석방된 후 거처한 곳은 광주의 별업(別業, 휴양을 위해 따로 마련한 집)이었다. 정지가 광주에 거주하고 있을 때 내려진 마지막 관직은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에 해당되는 종2품 품계인 판개성부사였다. 그러나 부임하지 못한 채 동년 10월 갑자기 사망한다. 이때 정지의 나이 45살이었다. 고려 조정은 그에게 '景烈(경열)'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정지는 사후 역사적 인물이 된다. 고려 수군의 창설자로 평가받는 것도 그중 하나다. 2007년, 해군은 1,800톤급 잠수함을 진수하고 잠수함의 이름을 '정지'함으로 결정한다.

관음포 전투를 기억하는 경남 남해군 사람들은 정지를 기리는 '3층석탑'을 세웠고, 광주에는 사당 '경열사'와 도로명 '경열로'도 만들었다. 그가 출전하면서 입었던 갑옷은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지 3층석탑(경남 남해군 고현면)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