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동짓달 기나긴 밤을 /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한국전통시 선집』 시조」(2025년, 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
기생 황진이는 거문고, 춤, 서예, 그림에 모두 능했으며 조선조 최고 수준의 시조를 남겼다. 일년 중 가장 긴 동짓달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을 품고 있는 이불 아래 넣어두었다가 님이 오신 날 밤에 펴겠다는 그 상상력이 심히 놀랍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러한 생각에 이르게 되었을까? 어른님을 그리는 갸륵한 연모의 정이 현실적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으니, 한 편의 시의 힘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진실로 시인은 그가 꿈꾸는 세계 안에서 밤의 한 허리를 베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열 번 스무 번 되풀이 읽어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은 명편 중의 명편, 절창 중의 절창이다. 이렇듯 인간의 상상력이 작동하는 공간은 무한대다. 시공을 초월한다.
황진이의 시조를 더 보자. 「내 언제 무신하여」다. 내 언제 무신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되/ 달 기운 삼경에도 님의 기척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이파리에 어쩔 바 모르겠네. 「청산리 벽계수야」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청산은 내 뜻이요」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는 흘러가도 청산은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울어 가누나. 「어뎌 내 일이여」다. 어뎌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처럼 황진이의 모든 시조는 깊은 울림을 안긴다. 빼어난 비유, 참신한 언어 운용, 독창적인 가락과 화법으로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히 천부적이었기에 이러한 절창들이 생산되었을 테지만, 숨은 노력도 간과해서는 아니 될성싶다. 아무리 뛰어나도 부단한 천착 없이는 명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황진이가 떠난 뒤 생전에 만나지 못했던 임제 임백호는 관직을 맡아 부임 길에 묘소 앞에서 술 한 잔을 따르고 나서 시조 한 수를 읊었다. 그 일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바로 파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청초 우거진 골에」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었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 하노라. 이 작품 역시 울림이 크다. 살아 있을 때 황진이와 임제가 만났더라면 더욱 드라마틱한 장면이 연출 되었을 법도 하다.
『한국전통시 선집, 시조』라는 책은 세계전통시인협회 한국본부 선정 시조 100선이다. 한글과 불어로 고시조 50편, 현대시조 50편이 수록되어 있다. 의미 있는 시조선집이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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