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사는 마음이 당신을 가둔다면 [.txt]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던 손미나씨
‘나는 행복하지 않다’ 느끼고 여행
선택받길 바라던 내 마음도 응시

많은 여자아이가 자신을 공주라고 믿는 시간을 갖는다. 화려하고 풍성한 튤립 같은 드레스를 입고서 사랑과 관심을 받는 소녀가 되는 꿈. 아이 스스로 주인공이 되는 이 시기를 ‘공주 드레스 시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나는 공주 드레스 시기가 없었다. 구레나룻이 귓불에 닿을 듯하면 아빠는 나를 이발소로 끌고 가 남자아이처럼 짧게 밀어버렸다. 목 놓아 울며 의사 표현을 해봤지만 단호한 아빠의 표정 앞에 이발사 아저씨만 쩔쩔맸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가꿀 수 없다. 그래서 어릴수록 부모 손길이 티가 난다. 어깨너머 살랑이는 머리, 구슬 달린 머리끈으로 땋은 머리, 깔끔하게 다듬어진 손톱은 그들이 부모에게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증명서였다. 그녀들이 받는 사랑이 미웠다. 손길이 닿는 동안 그들에게 쏟아지는 부모의 시간이 슬펐다. 그들이 앙증맞은 옷을 입고 귀염받는 비숑 프리제나 말티푸라면, 꼬질꼬질하고 구겨진 내 모습은 마치 들개 같아서. 그래서 남자아이처럼 행동했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올 때와 에나멜 구두를 신었을 때 걸음걸이와 마음 자세까지 달라지는 것처럼, 나는 여느 여자아이들이 고르는 ‘달빛 천사’ 대신 ‘디지몬 어드벤처’를 봤고 ‘선택받은 아이들’이 되기를 꿈꿨다.

놀랍게도 이 꿈은 서른이 된 지금까지 무의식 속에서 나를 끌어왔다. 누군가가 나를 선택해주기를 기다리면서. 어질러진 집을 정리할 때도, 레슨을 받기 위해 곡을 연습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모습은 사랑받을 수 없어. 이 정도로는 선택받을 수 없어.’ 내 몸을 움직이는 동력은 버림받거나 방치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나를 선택할 흐릿하고 모호한 누군가를 위해 움직였다. 때로는 기대감에 부풀어 아주 바쁘게 살았고, 그 안에 나를 위한 마음은 없었다.
디즈니 ‘라푼젤’ 오에스티(OST)에는 ‘웬 윌 마이 라이프 비긴’(When will my life begin, 내 삶은 언제 시작할까)이라는 곡이 있다. 하루 종일 청소하고 빵을 굽고 빈 벽을 찾아 그림을 그리며 바쁘게 살아가지만 성안에 갇힌 삶. 이 책을 읽으면서 이 곡이 계속 맴돌았다. 내가 갇혀 있는 곳은 몇층일까. 너무 높아 사람들이 쉽게 오를 수 없는 성일까? 칠흑같이 깊어 빛도 하나 들일 수 없는 지하일까.
저자는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 서울 교장, 허핑턴포스트 코리아 편집인, 한국방송(KBS) 아나운서, 손미나앤컴퍼니 대표, 여행 작가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왔다. 쉼 없는 생활을 지속하던 끝에 작가는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그녀는 외롭게 남겨진 영혼의 실체를 마주하고 절망했다. 남들에게는 현재의 기쁨을 희생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은 숨 한번 돌릴 틈 없이 달려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대학 시절 ‘댄싱퀸’이었을 정도로 춤을 좋아했다. 재즈부터 발레와 아프리카 토속 춤까지 안 배워본 춤이 없을 정도로. 서른이 되기 전 눈부신 성취를 이룬데다가 댄싱퀸이라니. 질투조차 버거운 그녀의 삶은 화려하게 빛나 보였고, 새어 나온 빛은 내가 있는 곳이 얼마나 깜깜한지 직면시켜주었다. 완벽해 보이는 그녀의 삶에서 과연 용기와 위로 따위를 얻을 수 있을까? 괜히 혀끝이 답답했다. 그녀에 대해 더 찾아볼까 싶어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다시 화면을 잠갔다. 불행하다 말한 마음을 돌보는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그녀의 얼굴이나 경력이 아닌, 글에서 찾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녀는 바쁜 삶에 까맣게 잊어버린 버킷리스트 ‘살사 배우기’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동안 팽개쳐둔 열정을 지지해주기로 한다. 쿠바 아바나에 살고 있는 베로니카의 나비 같은 춤 선에 반해 이메일을 보냈고, 일사천리로 여행을 떠났다. 기막힌 전망의 빌라에서 평화로운 아침을 만나 따뜻한 차 한잔을 우려 발코니에 앉은 순간, 그녀는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목격한다. 적막함으로 가득 찬 텅 빈 공간에 홀로 있는 한 문장.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우울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몇년쯤은 버틸 재정도 있고, 건강하고 젊고 아름다운데, 행복해야 마땅한데 말이다. 그녀도 마침 이렇게 생각했다. ‘제대로 미친 거 아니야? 배가 부를 대로 불렀군.’ 책을 넘어 저자와 생각이 통하자 짧은 웃음이 입가에 튀어나왔다. 그래. 행복할 수 있는 조건 속에 살아도 우울할 수 있다. 얼마 전 나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아니, 모쌤은 재능도 많은데 왜 우울하세요?’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질문을 건넨 이를 설득하긴 했던 것 같다. ‘그러네요. 미안해요. 재능과 우울한 건 아무 상관이 없는데’라고 말을 이어주셨던 것을 보면.
요즘 에스엔에스(SNS)에는 실패감을 맛본 사람들이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단숨에 떠나는 영상들이 자주 떠오른다. 국내에서 좌절했던 사람들이 외국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환경이 문제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희망이 생기기 때문일까. 저자도 불행한 마음을 돌보기 위해 단숨에 떠났다. 그곳에서 명상 수업을 이끈 인도인 구루와 따로 만나야겠다는 강한 끌림으로 1시간의 면담 기회를 얻는다. 간절한 마음만큼 꼼꼼하게 준비해서 나눈 대화는 에세이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지금 미나씨의 마음이 말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을 거예요. 저는 이런 상황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돼요.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오랜 시간 혼자 내버려둔 아이가 쉽게 입을 열지 않는 건 당연하니까요.”
인도인 구루는 정신(mind), 마음(heart), 몸(body)을 마치 고유한 인격을 가진 존재처럼 설명했다. 구루는 자신이 만난 대부분의 한국인이 같은 어려움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다들 나처럼 성안에 갇혀 바쁘게 일하며 ‘진짜 삶’이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열심히 살아가는 그 마음이 오히려 자신을 가두고, 괴롭히고 있다면, 그런 이를 만난다면 나는 이 책을 조용히 선물해주고 싶다.

싱어송라이터 모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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