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기’ 힘든 시대, 돌봄으로 건너기

아침부터 밤까지 줄담배를 피우는 시설의 ‘터줏대감’과 신문의 같은 면만 뚫어져라 보는 아주머니, 냅킨을 접었다가 펴길 반복하는 남성, 머리에 난 구멍을 돌로 막아야 한다는 청년. 조현병 환자를 비롯해 정신질환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 일본 오키나와 정신과 주간 돌봄 시설의 ‘평화로운’ 풍경이다. 2010년 교토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이곳에 취직한 임상심리사 도하타 가이토 씨의 첫 번째 업무는 이들 곁에 ‘대충 앉아 있기’였다.
학사부터 시작해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총 9년, 임상심리사가 ‘고학력 워킹푸어’가 되는 지름길임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연구실(학계)보다 상담실(현장)을 고집했으나 첫 직장에서 맡은 주된 업무는 상담이 아니라 ‘그저 있기’였다. 할 수 없이 쿠션이 꺼진 낡은 의자에 앉아 사람들을 둘러보며 생각한다. ‘더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다’ ‘돌봄이 아니라 치료를 하고 싶다’ ‘괴롭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돌봄 시설이 ‘그저, 있기’를 위한 장소라는 걸 깨닫는다. 사회에 있기가 어려워 환청 따위를 듣는 이들이 시설에 모였다. 그때 시설의 역할은 ‘있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 ‘있기’를 가능하게 하는 건 돌봄이었다. 정신치료 전문가로 통하는 임상심리사의 주 업무도 병원보다 그 옆, 돌봄 시설에서 이루어졌다. 요리와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때때로 야구와 카드놀이를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 치료를 명분으로 환자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던, ‘상담 흉내’를 그만두게 된다. 이들에게 필요한 건 치료가 아니라 돌봄이었기 때문이다.
임상심리사가 4년간 정신질환 당사자들과 함께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돌봄과 치료에 관해 고찰한 연구서이자 에세이 〈있기 힘든 사람들〉이 최근 국내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일본에서는 출간 이후 〈아사히신문〉이 주관하는 ‘오사라기 지로 논단상’을 받고 한 해 최고의 인문서를 꼽는 ‘2020 기노쿠니야 인문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돌봄 노동의 사회적 가치, 능동도 수동도 아닌 중동태로 존재하는 돌봄의 본질, ‘있기’를 부정하는 신자유주의 속성, 돌봄의 즐거움까지, 돌봄을 둘러싼 ‘거의 모든’ 담론을 다룬다.
임상심리사이자 의료인류학자이기도 한 도하타 가이토 씨는 이 책에서 돌봄과 치료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다. 치료는 상처와 마주보는 일이다. 아픈 곳을 직접 건드린다. 돌봄은 상처 입히지 않는다. 그때그때 욕구에 대응하며 상대의 의존을 받아준다. 돌봄의 원리에 의존이 있다면 치료의 원리에는 자립이 있다. 돌봄과 치료는 당분과 염분처럼(단짠단짠한 음식처럼) 그때그때 비율이 다를 뿐 언제나 섞여서 존재한다. 둘 사이 우열은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압도적으로 치료에 우호적이다. 돌봄의 대상, 즉 ‘그저 있을 뿐’인 사람은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질환이나 돌봄 시설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무언가 ‘하기’를 당연시 여기는 세상이다. 도하타 가이토 씨는 누구든 가족에게, 동료에게, 친구에게 온전히 의존하고 돌봄을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있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는 ‘한국도 일본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있기 힘든 나라가 아닐까’ 상상한다고 썼다. 한강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일본에 소개된 한국 소설을 읽으며 그렇게 느꼈다. ‘있기’ 힘든 시대를 건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재 도쿄에서 심리상담실을 운영하는 도하타 가이토 씨를 서면으로 만났다.

팬데믹 직전 책이 출간되어 일본에서 각종 상을 수상했다. 돌봄에 대한 담론이 거의 없던 시기였는데 반응이 좋았던 이유는 뭘까.
일본 사회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를 추구한 결과 불안정성이 높아지고 격차가 확대되었다. 최근 30년간 사람들은 자유로워졌지만 제각각의 인생은 몹시 불안정해졌다. 한국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니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것 같다. 그런 사회에서 ‘그저, 있을, 뿐’으로는 자신만의 자리를 확보할 수 없다. 무언가 ‘함으로써’ 성과를 내야 하고, 스스로 자신이 ‘있을 자리’를 쟁취해야 한다. 그런 인식이 일본 사회 전체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불안에 노출되었고 점점 피폐해졌다. 애초에 사람은 무언가 ‘하기’를 끝없이 지속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이 ‘그저, 있을, 뿐’에 가치가 있고, 그 ‘있기’를 밑받침하는 돌봄 노동이 고되지만 그만큼 값지다는 것을 보여주어 많은 독자들이 좋게 봐준 것 같다.
팬데믹을 거치며 돌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극한으로 경쟁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의문이 퍼져 나가며 많은 사람들이 돌봄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런 반면 국가주의도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사실 국가주의는 최근 몇 년 동안 일어난 변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가 ‘있기’를 원할 때, 혹은 어딘가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을 때 국가의 역할이 전면적으로 대두되기 마련이다. 역설적이지만 자국민 우선주의는 어떤 면에서 ‘있기’의 중요성을 긍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각자의 ‘있기’를 지키기 위해서 국경을 열기보다 닫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지금의 미국이지만, 전 세계 공통된 현상이라 생각한다.
현재 도쿄에서 심리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오키나와에서 한 일과 어떻게 다른가.
도쿄와 오키나와는 경제적 조건이 다르고, 돌봄 시설과 심리상담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상태도 매우 다르다. 요즘은 돌봄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돌보며 단단한 갑옷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상담실에서 나누는 대화의 주된 주제는 돌봄에 대한 절망감과 타인에 대한 두려움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들을 치료할 때는 타인에게 순수하게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오키나와 돌봄 시설에서 한 일과 현재 도쿄에서 하는 심리상담은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상담을 하다 보면 자본주의가 얼마나 인간이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드는지 뼈저리게 느낀다.
돌봄이나 시설 관련 종사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있기’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노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쉬지 않고 경쟁만 벌일 수는 없다. 육상 선수만 해도 경주 전후 대기실에 머물며 스태프들의 이런저런 돌봄을 받는다. 사람이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있기’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노력할 수 없을 때 생존을 위협받는다면, 그 공포 때문에 노력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아니더라도 가족과 친구는 노력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있기’를 긍정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취약성이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이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길 바란다.
돌봄 시설에서 만난 조현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있기’를 설명하지만 그것에 한정된 얘기는 아닌 것 같다.
돌봄 시설에서 일하며 자연스레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배구를 할 때나 카드놀이를 할 때, 또 함께 식사를 할 때 정신질환 유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배구에서 득점했을 때의 기쁨도, 카드놀이에서 졌을 때 느끼는 분함도, 밥을 먹을 때의 “맛있다”라는 말도, 병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 뒤집어 말하면 사람은 그런 기쁨과 분함과 맛있음을 접할 수 없을 때 상태가 나빠지고 병에 걸리게 된다. 카드놀이를 즐길 수 있는 건 오로지 건강할 때, 즉 나의 ‘있기’가 확보되어 있을 때뿐이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있기’란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고 ‘카드놀이나 할까’라고 생각할 수 있는 휴일의 감각이다. 휴일이 없다면 일을 계속할 수 없지 않나.
돌봄에 고통만이 아니라 기쁨도 있다고 했는데 좀 낯설게 들린다.
‘돌봄’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준다. 인간 삶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동시에 성가시고,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다. 다만, 정말로 돌봄이 힘들 때는 돌봄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는 돌봄을 주위에서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고 이해해주지 않을 때라고 생각한다. 육아가 정말로 고통스러운 순간은 주위에서 냉담할 때다. 오키나와에서 고통스러웠던 기억도 환자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같은 직원 혹은 상사와의 관계였다. 무더운 날 공원에서 야구를 한 다음 멤버(환자들)와 직원이 다 함께 나무 그늘에서 콜라를 마셨던 순간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시간은 정말이지 상쾌하고 멋졌다. 그때 나의 ‘있기’가 존중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돌봄의 기쁨이란 무엇인가. 결국 주위에서 나를 돌봐줄 때만 돌보는 일의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유하면 소멸하고, 공유할 때 생성되는 것. 그것이 돌봄의 기쁨이다.

시설 사람들이 돌봄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돌봄을 주기도 한다.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돌봄을 하는 것은, 돌봄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돌봄론의 본질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탱해준다. 고독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의미다. 요즘 나는 기업가와 연예인을 상담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손에 넣은 사람들이 어째서 마음의 고통을 떠안고 있을까. 무언가를 쟁취하는 인생 속에서 고독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독해지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어디에도 ‘있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것도 돌봄의 기쁨과 관련이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 인간이 상품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봄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준다. 돌봄이 밑받침해주는 ‘있기’란 타인과 함께 ‘있는 것’이다. 상호교환성이야말로 돌봄의 본질이다.
한국도 ‘있기 힘든 나라’가 아닐까 짐작했는데.
한국과 일본은 여러 공통의 과제에 직면해 있다. ‘동아시아적 고독’이라는 커다란 주제도 있다. 이 책을 마중물 삼아 많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길 바란다. 또 일상 속 돌봄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족을 돌보는 분도 있을 테고, 직장에서 돌봄을 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돌봄은 유별난 일이 아니다. 자녀의 옷을 세탁기에 돌리고 건조대에 너는 것도 돌봄이고, 직장에서 화분을 배치하는 것도 돌봄이다. ‘매출을 창출하지 않는 조용한 일’들이 얼마나 인간의 근본적인 부분을 밑받침하는지 전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그리고 내가 실은 사소한 돌봄에 둘러싸인 덕분에 어떻게든 숨 쉬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그 역시 근사한 일이라 생각한다. 산소처럼 당연하지만 부족하면 질식하고 마는 마음의 교류에 관한 책이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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