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어로 읽는 청오 차상찬] 20. 오랜 세월, 애처롭고 원통한

김진형 2025. 8. 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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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보다 애절한 춘천기생 전계심의 사랑 이야기
-춘천 기생 계심의 무덤
(1934년 6월 신여성 8권 5호)
조선 정조시대 이름난 기생
춘천 아전 김씨와 살림 차려
부모 강제로 화류계 재입적
정조 빼앗기자 유서 쓴채 자결
조선일보 ‘명기열전’ 연재 화제
정비석 훼손된 묘소·비석 발견
소설 한계 명확 사실 구분 왜곡
차상찬 한문 한시 능숙 해석 신뢰
▲ 1934년 6월 신여성 8권 5호 표지(사진 왼쪽)와1934년 신여성에 실린 차상찬의 전계심 이야기 ‘천고애원 춘기계심총’.

검각(劍閣)과 같이 험준한 삼악산이 푸른 하늘을 찌르는 듯이 구름 밖에 우뚝 솟아 있고, 흰 비단처럼 고운 소양강과 북한강이 광활한 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며, 이태백의 옛 시 그대로 “세 개의 산은 반이나 푸른 하늘 밖에 떨어졌고, 두 강물은 중간에서 백로주로 나뉘어지네” 처럼 뛰어난 경치를 가진 춘천은 맥국의 옛 도읍이요, 강원도의 수부이다. 예로부터 산수가 매우 아름다운 만큼 소양정, 봉황대, 청평사 등의 명소·고찰도 상당히 많거니와, 재주 있는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가 많아서 이름난 인물 또한 많았다. 그 허다한 명인 중에 가장 한 많고 이름이 높았던 미인이 하나 있었으니 그는 절개 있는 기생, 계심이다.

계심은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의 조선왕조 정조 시대 사람이니, 본래 성은 전 씨였다. 원래 천한 가정에 태어난 탓으로 어려서부터 일찍이 기생을 등록하는 장부에 이름을 두게 되었으나, 천성이 깔끔하고 곧아서 다른 기생들과 달리 함부로 방탕하게 놀지를 않았다. 행세하는 집의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단정하게 가지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17세 때에 기생 장부에서 빠져 춘천의 아전인 김 씨의 집으로 들어가서 몇 해 동안 살림살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 그의 부모가 남의 꾀임을 받고 기생을 양성하는 교방에 다시 입적시켰다.

그때 계심이 자기가 사랑하는 김 씨와 잠시나마 떨어지게 되는 안타까운 사정을 생각한다든지, 또는 자기가 몸을 다시 더럽히고 마음에 맞지 않는 화류계의 함정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생각을 한다면 당장에 자결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또한 부모가 시키는 일이라 마음대로 거역할 수도 없고 또 자기 뱃속에는 벌써 사랑하는 김 씨의 아이가 들어있음으로 역시 가여운 생각이 나서 차마 죽지 못하고 울며불며 김 씨와 이별하고 여행 채비를 갖춰서 한양성으로 들어왔었다.

비록 사정상 다시 화류계에 몸을 던졌으나 고결하고 유정한 성품은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항상 몸에다 칼과 약을 감추어두고 만일의 경우에 어떤 불량하거나 악한 사람에게 강제로 정조를 빼앗기는 일을 당한다면 그 칼과 약으로 삶을 마치려 결심하고 항상 자기의 신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계심은 이미 몸이 화류계에 매여 있고 얼굴이 남달리 어여쁘니만큼 일반 남자들이 접근하였고, 모든 남성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와 한 번만 대해 본 남자이면 누구나 정신을 잃다시피 마취가 되어 혹은 금전으로 꼬이고 혹은 세력으로 위협해 그의 정조를 빼앗고자 했다.

그러나 결심이 굳은 계심은 금전이나 세력에 조금도 그 기개가 꺾이지 않고 모든 남성의 요구를 거절하니, 많은 남자들은 그의 절개와 지조 있는 것을 감탄했다.

▲ 1976년 8월 2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정비석과 전계심 비

하지만 불량한 못된 무리는 도리어 그를 건방지고 괘씸하게 생각하고 미워했다. 그중에도 어떤 악소년의 무리는 그를 흠모하던 끝에 짐승과 같은 모질고 사나운 극단의 욕심을 가지고 어느 날 밤에 그의 집으로 놀러 갔다가 폭력으로 정조를 유린했다. 이에 계심은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이나, 강제의 굴욕을 당하고 또 순결무구한 뱃속의 어린아이까지 놀라 유산하게 되니 어찌 그냥 참고 살아 있을 수가 있었으랴.

이에 즉시 자살을 결심하고 자기의 남편이었던 김 씨에게 유서를 써서 놓고 집안사람이 잠든 기회를 엿보았다. 결국 그는 자기 손으로 그 악소년에게 잡혔던 머리와 젖을 칼로 잘라버린 다음에 독약을 먹고 죽었다.

그때 그의 남편이었던 김 씨는 계심과 이별한 후 항상 마음이 심란하여 밤에도 잠을 잘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밤에 비몽사몽간에 꾼 꿈속에 계심이 나타났다. 그녀는 전신에 유혈이 낭자하고 눈물이 비 오듯 하며 자기를 고향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김 씨는 꿈에서 깨고 너무나도 이상해 그날로 즉시 서울로 가서 계심의 집을 찾았으나 불쌍히 죽어 있었다. 김 씨는 그 사실을 들어 관청에 호소하고 즉시 시체를 수습해 고향인 춘천으로 돌아가서 봉의산 기슭에 장사지냈다.

그때 순찰사 이병정은 그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그 집에 정문을 세우고, 군수(한용화)는 또 그의 무덤 앞에다 ‘춘기계심순절지분(春妓桂心殉節之墳)’이란 여덟 자를 새긴 돌로 만든 비석을 세웠다. 그 비석에 새긴 글은 박종정이 짓고, 글씨는 유상륜이 썼으며, 때는 정조 20년인 1796년 5월이었다.

이 사실은 춘천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인데, 아래에 적는 그 비명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므로 후일의 참고를 위하여 그 비명 전문을 기록한다.

▲ 춘천 소양정에 위치한 전계심을 기리는 비석 ‘춘기계심순절지분(春妓桂心殉節之墳)’.

해설

전계심이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조선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명기열전’이었다. 당시 ‘춘천에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하고 놀랄 정도로 정비석이 써 내려간 이야기는 큰 화제였다. 정비석은 한 명의 명기를 선정하고 소설로 쓰기 전에, 자신이 탐사한 기록을 싣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내용이 다소 안타깝다. 그는 불과 12년 전(1960년대 중반으로 예상됨) 춘천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있었던 전계심의 묘소와 비석이 감쪽같이 사라졌음을 밝힌다. 민가가 확장되면서 굴삭기에 훼손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독자의 도움으로 봉의산 중턱에 자리 잡은 묘비를 찾게 되는데, 이미 훼손된 모습에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가 연재한 글은 전계심을 알리는 데는 큰 역할을 했지만 소설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사람들은 소설과 사실을 구분하지 않았다. 더구나 비문은 7언 40구의 한자로 쓰였고, 세월에 마모된 글자 때문에 전계심과 관련한 이야기들은 많이 왜곡돼 전해졌다. 지금도 소양정 인근에 자리한 전계심비의 안내판이나 인터넷에 올려진 글에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적지 않다.

물론 비문이 한자로 이뤄졌고, 구체적인 내용이 생략된 한시라는 점에서 부득이한 일이기도 하다. 묘비에 적힌 글자가 그녀에 대한 기록의 전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차상찬의 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당시 한문과 한시에 능한 인물이었다.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그의 형 차상학은 손병희로부터 ‘당대 명문장가’라는 칭호를 들었던 인물이었고, 이돈화도 ‘한시로 당대 가장 뛰어난 일인자’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차상찬 역시 한문과 한시에 능했다. 그가 보성중학교를 다닐 당시 한자로 써냈던 답안지는 만점에 추가 점수를 받을 정도였고, 1920년대 초반엔 여러 차례 한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였기에 전계심 비문에 대한 해석은 신뢰할만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해석이 난해한 한시라는 점에서 차상찬 역시 빈 공간을 추측과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는 소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한문과 한시에 능했고, 조선시대에 태어났던 그의 상식이 채우는 빈 공간은 소설보다는 사실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차상찬의 글 역시 이후 검증받고 있고, 그 역시 틀릴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사)차상찬기념사업회에서 출간한 ‘차상찬전집1-8’과 ‘차상찬현대문선집1’에서도 차상찬이 남긴 전계심 관련 원문과 현대문을 싣고 있는데, 차상찬이 채우지 못하거나 빠트린 부분을 보완했다. 그럼에도 온전히 차상찬의 글은 중요하다. 차상찬 이전에 송병선이 ‘동유기’에서 전계심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이인직 역시 그의 대표작 ‘귀의성’에서 전계심을 모티브로 삼기도 했지만, 비문의 전문을 싣거나(개벽 42호, 1923.12.01.), 그 해설 전체(위의 글, 신여성 8권5호, 1934.06.)를 발표한 건 차상찬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글은 1937년 발간한 그의 저서 ‘해동염사’에 다시 한번 실리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춘천과 인연이 없던 이인직이 1918년에 발표한 ‘귀의성’에서 어떻게 전계심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는가이다. 당시 이인직은 ‘만세보’의 주필이었고, 앞서 이야기한 차상학은 만세보의 기자(강원도 최초의 기자)였다. 이인직은 차상학을 통해 춘천의 이야기를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소설의 무대가 차상찬의 고향이기도 하고, 차상찬 3형제가 삼악산을 삼학산(三鶴山)으로 표기했던 것을 이인직도 소설에도 그대로 표기하고 있다. 어쩌면 전계심과 차상찬의 첫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비석의 말에 의하면 처음 전계심의 묘와 비석을 보았을 때는 민가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소양1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짐작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총탄 자국으로 보이는 묘비의 흔적은, 소양1교 교각에 남아있는 한국전쟁 당시의 총탄 자국과 연을 같이 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들 사이에서 지난한 시간을 보낸 그녀의 삶이 전쟁까지 관통했다는 점은 미안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소양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인간사와는 조금은 동떨어진 곳에 있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한 쉼의 시간이 아닐까 싶다. 그저 차상찬을 위시한 후손들의 관심을 조금은 기껍게 여기길 바랄 뿐이다.

△현대어 번역·해설=(사)차상찬기념사업회·이현준 한림대 강사 △발췌문헌=수춘산인(壽春山人). ‘오랜 세월, 애처롭고 원통한 춘천 기생 계심의 무덤 (千古哀怨 春妓桂心塚)’ 신여성 8권 5호. 193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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