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 덮친 산청 큰들 마당극마을…‘찔레꽃’ 다시 피겠죠
일주일 만에 흙더미서 파낸 소품 절반은 복구 불가
“재난 지역 눈치 보여…” 잇단 예약 철회 ‘한숨’
마을 체험 포기 않은 청년들 방문에 모처럼 웃음

극한 호우로 마을 뒷산에 산사태가 나는 등 피해를 본 산청 극단 큰들이 잇따르는 공연 취소로 이중고를 겪고 있다.
극단 큰들은 마당극 '찔레꽃' 100회 공연을 사흘 앞둔 지난 17일 밤 큰들마당극마을에서 급히 대피했다. 큰들마당극마을은 산청군 산청읍 내수리 산자락에 조성된 마을로, 지난 2019년부터 극단 큰들 단원 40여 명 대부분이 이주해 함께 먹고 자고 공연하는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시간당 100㎖, 마을을 조성한 뒤 처음 마주하는 극한 호우에 급히 산청군이 마련해준 숙소로 피신한 단원들은 혼란 속에 미리 준비해 나온 소품들로 19일 동의보감촌 마당극 상설공연으로 '찔레꽃' 99번째 무대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튿날인 20일 동의보감촌 주제관에서 열 예정이던 '찔레꽃' 100번째 특별 공연은 무대를 몇 시간 남겨두고 취소가 결정됐다. 당시 산청에서는 집중호우로 인해 사망·실종만 14명에 달했다. 취소된 공연을 뒤로 하고 단원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당극마을로 향했다. 평소 차로 5분이면 닿는 거리지만, 산사태로 길이 막혀 우회 도로를 통해 50분 만에 마을에 닿았다.
뒷산 300m 정도 임도에서 시작된 산사태는 다행히 마을 바로 위 지하수 저장 물탱크 앞에서 멈춰선 모습이었다. 산사태를 포함해 경사지 9곳이 무너지고 최근 공사한 마당엔 토사가 쌓였지만 다행히 극장과 숙소, 다목적 공간 등 건물은 모두 무사했다.

문제는 극단이 공연 소품을 보관하기 위해 아랫동네 내수마을에서 빌려 쓰던 창고였다. 산사태로 흙더미가 창고 벽을 뚫고 들어오면서 소품 90%가량이 토사로 뒤덮인 상태였다. 19일 공연을 위해 가지고 나왔던 '찔레꽃' 소품 외에는 모두 엉망이 된 상황.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마당극마을 아래의 이웃 마을 4곳(내수·가촌·병정·부리)이 산사태로 극심한 피해를 봤다. 마을마다 짙게 맴도는 슬픔에 길을 지날 때마다 울컥했다. 인명 피해가 나고 삶의 터전이 모두 무너진 이웃에 비하면 극단은 피해가 작은 편이라 여겼다. 넋 놓고 앉아 있는 내수마을 어르신들께 '찔레꽃' 100회 공연을 찾은 관객을 위한 선물로 준비했던 수박과 떡, 음료수를 드렸다.

낮에는 차단된 도로를 돌아돌아 전기·물·통신이 차단된 마당극마을에서 복구 작업을 하고 밤에는 대피용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하길 며칠, 타지역에서 힘을 보태기 위해 산청을 찾은 119나 자원봉사단체 차량을 보면 눈물이 났다.
지난 23일 대피령이 해제되자 단원들은 일주일 만에 마당극마을로 돌아가 각자의 집에 몸을 뉘었다. 이후로는 마을을 정리하고 소품을 되살리는 데 집중했다. 당장 25일 합천 쌍백초에서 '효자전'이 예정돼 있었는데, 소품을 하나라도 더 건지기 위해 흙더미에서 조심조심 파냈다. 밤새 열심히 씻고 말리고 수리해 색칠해 봤지만 소품 절반 정도는 돌이킬 수 없게 됐다.

'효자전'은 마지막 저승사자 역할과 상여 소품이 더는 쓸 수 없게 되면서, 남은 소품에 맞춰 급히 장면을 다듬고 새 장면을 창작하는 등 개작해 겨우 공연을 치렀다. 오는 2일로 예정된 거창국제연극제 '오작교 아리랑' 공연도 무사히 치르기 위해 신규 소품을 제작하고 있다.
마당극마을은 극단 힘으로 가능한 복구 작업은 모두 마무리되고, 현재 산청군이 보낸 중장비로 마을 도로나 집 출입문을 막은 흙더미를 치우는 작업이 진행되면서 어느 정도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 외 마을 내 산사태나 토사 유출 현장도 차근차근 복구될 예정이다.
수해 이후 육체적·정신적으로 지친 극단 큰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길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마을에 찾아와 공연을 보기로 예약했던 단체·모임이 "수해와 산사태로 힘들 텐데, 큰들 마을을 방문하기는 산청 수재민에게 미안하다"며 취소를 통보할 때는 힘이 빠진다. 극한 호우 이후 취소된 공연만 7개, 수해로 힘들고 공연 취소로 인한 재정 악화로 또 힘들다. 다행히 공공이 맡긴 공연은 관련 법에 따라 손실을 보전하거나 시일을 연기해 진행할 수 있을 전망이지만, 민간 차원의 취소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김세림 극단 큰들 기획실장은 "수해 지역 농산물을 더 많이 구입하는 게 이곳 농민을 돕는 것처럼, 저희 공연을 계속하게 해 주는 게 저희를 돕는 것"이라며 "수해 지역을 이유로 예약된 공연을 취소하지 말고 그냥 진행해달라"고 호소했다.

침울한 극단 큰들에 최근 반가운 손님들이 도착했다. 큰들이 운영하는 청소년 체험 '인턴십'으로 1명, 청년 체험 '큰들집'으로 2명 등 모두 3명의 청춘이 이곳을 찾아 여름을 함께 보내게 된 것이다. 애초 방문하기로 한 4명 중 1명은 수해로 마음을 돌렸지만 전북 무주와 제주,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청춘들은 예정대로 큰들을 찾았다.
그동안 단원들끼리 '웃어보자'고 외쳐도 우울한 분위기가 맴돌았지만, 새로운 친구들이 큰들에 함께 하면서 지난 29일 밤 진행한 환영회에는 오랜만에 생기 있는 웃음이 흘렀다. 수해에도 불구하고 마을을 찾아준 이들 덕에 지친 마음이 풀리고 새로운 기운이 샘솟는 느낌이었다.
극단 큰들은 슬픔 속 모든 것을 다 중단하기보다는 예술로 위로하고 함께 힘을 북돋는 여정에 나설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모든 걸 다 취소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훈수를 두기도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재개한 청소년 대상 '큰들캠프'(8월 7~10일)를 비롯해 연중 가장 큰 행사인 '큰들마을축제'(9월 11~14일)도 차분한 분위기 속에 진행해 볼 생각이다.
전민규 예술감독은 "오늘 대책 회의를 통해 수해 피해로 아파하는 분들께 위로의 마음을 전하는 자리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며 "9월쯤 피해를 본 인근 내수면·차황면 주민을 마을로 모셔서 음식과 풍물로 위로하는 액풀이에 나서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백지영기자 bjy@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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