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이 드러낸 ‘법관의 왕국’, 이런 나라는 없다 [아침햇발]


박용현|논설위원
일본에는 국민들이 직접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파면시키는 제도가 있다. 일본 헌법 제79조에 규정된 국민심사다. 우리나라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기능을 겸하는 일본 최고재판소의 재판관들은 임명된 뒤 처음 치러지는 총선 때 전국민의 신임투표에 부쳐진다. 국회의원 투표지와 별도로 재판관들의 이름이 적힌 투표용지가 교부되고, 유권자들은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재판관 이름에 ×표를 한다. ×표가 투표자의 과반에 이르면 그 재판관은 바로 파면된다.
이와 유사한 제도가 우리에게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를테면, 임명되고 1년이 지난 뒤 치러지는 첫 전국 규모 선거에서 국민심사를 받게 했다면? 조희대 대법원장과 서경환·권영준·엄상필·신숙희 대법관이 지난 6월3일 대통령선거 때 국민심사를 받았을 것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만약 이런 제도가 있었더라도 5월1일 이재명 대선 후보의 공직선거법 재판 상고심 선고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국민심사로 파면된 재판관은 아직 없다. 하지만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라는 상징적 의미는 작지 않다. 사법권의 근원은 주권자 국민임을 제도로써 선언하는 것이다. 국민을 무시하거나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삿된 생각을 억제하는 것이다.
일본 헌법은 법관(재판관) 전체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도 두고 있다. 제64조에 규정된 재판관탄핵재판소다. ‘국회는 파면의 소추를 받은 재판관을 재판하기 위하여 양원의 의원으로 구성하는 탄핵재판소를 설치한다.’ 탄핵 대상 공직자 중 하나로 법관을 포함시킨 우리 헌법과 달리, 일본 헌법은 법관만 콕 집어 탄핵 조항을 두고 있다. 그리고 탄핵 재판은 국민의 대표인 의원들이 맡는다. 파면 사유도 우리처럼 ‘헌법·법률 위반’에 그치지 않고 ‘재판관으로서 위신을 현저하게 잃은 비행’까지 포함한다. 지금까지 8명의 재판관이 파면됐다. 향응 수수, 스토킹, 지하철 불법촬영, 부적절한 에스엔에스 글 등이 사유였다. 우리 기준에 비춰보면 탄핵 사유까지는 안 되는 것도 있다. 그러나 법관은 높은 윤리 기준을 통해 국민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원칙을 제도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도가 있다면 지귀연 판사는 어떻게 됐을까? 유흥주점 향응 의혹이 구체적으로 제기됐는데도 대법원은 윤리감사관실 조사에 나선 지 두달이 넘도록 일언반구도 없다. 이에 대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수사가 진행 중인데도 지 판사는 여전히 중차대한 12·3 내란 재판의 재판장이며, 그 재판은 내란 우두머리의 구속 취소와 ‘배째라식’ 재판 불출석, 재판부의 이해 못 할 저자세, 각종 특혜 논란 등으로 넝마처럼 해어지고 더럽혀진 채 진행되고 있다. 집중심리로 속도를 내도 모자랄 판에 지 판사는 느긋하게 재판 일정을 잡아놓고 휴가철 2주간 휴정도 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재명 후보 선고 때는 신속 재판을 그토록 강조하더니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내란 재판에는 관심도 없다. 특검이 청구한 영장이 일반 사건보다 더 자주 기각되는 것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이다. 듣도 보도 못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형사사법체계가 난장판이 돼가는 느낌마저 든다.
사법부가 이 지경에 이른 이유는 민주적 통제의 부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조금만 밖으로 눈을 돌려봐도, 사법부가 우리처럼 견제와 균형 원리에서 벗어나 있는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독일 연방 법관은 법관선출위원회가 선출하는데, 위원회는 연방 의원 16명과 16개 주 법무장관들로 구성된다. 사법부는 배제된 구조다. 많은 유럽 국가들이 법관 인사와 징계를 담당하는 별도의 위원회를 두고 있는데, 여기에는 입법·행정부에서 추천된 외부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다. 미국에서는 직접 선거로 법관을 뽑는 22개 주는 차치하더라도, 나머지 대부분 주에서도 유럽과 유사한 위원회가 법관을 선출한다. 그리고 20개 주에서는 일본처럼 일정 기간 뒤 법관 신임투표를 실시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선 대법원장 1인이 법관 인사를 좌지우지한다. 국민을 바라보고 재판하는 법관보다 대법원장을 바라보고 재판하는 법관이 요직을 차지하는 구조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국민 주권이 미치지 않는 또 하나의 국가, ‘법관들의 왕국’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는 이론적 우려를 넘어 엄연한 현실임을 내란 이후 국민들은 체감하고 있다. 사법부 불신은 임계점을 넘고 있다. 오죽하면 특별재판소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3분의 2에 이르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겠나.
사법권은 법관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다. 이에 대한 사법부의 깊은 성찰과 제도적 선언이 필요하다.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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