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0억불 투자펀드, 1000억불 에너지 구매 약속하고 관세율 25%→15%… 최대 수출품 ‘車‘는 못 지켜
‘FTA 체결국’이라는 명분, 통상 협상에 반영 안 돼
농축산물 시장 개방 막았지만, 정상회담 의제 가능성

한국이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전략산업 협력펀드를 조성하고 1000억달러 규모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율을 25%에서 15%로 10%포인트 하향하기로 31일 합의했다. 관세율 15%는 미국이 일본·유럽연합(EU)과 타결한 관세율과 동일한 수준이다. 한국과 미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나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일본이나 EU보다 관세율을 낮추지 못한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운 대목이다.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인 철강에 부과되는 품목관세율도 내리지 못했다.
다만 미국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쌀·쇠고기 수입 문턱 완화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은 이번 합의에서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미 통상 협상 후 본인의 트루스소셜 계정에서 “한국이 자동차와 트럭, 농산물을 포함한 미국 제품을 수용해 무역을 완전히 개방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식량 안보와 민감성을 감안해 쌀과 쇠고기는 추가 개방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라고 밝혔다. 농산물 시장 개방은 농민을 비롯해 상당수의 국민이 민감하게 보는 영역이다. 김 실장은 “민감성과 역사적 배경 등을 충분히 감안해 (농축산물의) 추가 개방을 막는 데 주안점을 뒀다”라고 했다.
◇ 韓 내준 카드는 산업협력 펀드 3500억불, 에너지 구매 1000억불
한미 통상 협상에서 한국 대표단이 제안한 첫 번째 카드는 3500억달러(한화 약 487조원) 규모의 펀드 조성이었다. 이중 1500억달러는 미국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조선 분야 펀드로 조성된다. 선박 건조와 MRO(유지·보수·정비)를 등 조선업 전반을 포괄한다고 김 실장은 설명했다.
나머지 2000억달러는 반도체와 원전, 2차전지, 바이오 등 전략산업협력에 활용된다. 각 분야별로 액수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펀드 조성 금액이 모두 미국 현지에 직접투자(FDI) 방식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김 실장은 “대출과 보증에 들어가는 돈이 가장 많을 것”이라면서 “직접투자의 비중은 매우 낮을 것”이라고 했다. 자본시장에서는 실제 출자액은 5% 정도로, 나머지는 융자나 보증 형식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와 함께 미국산 LNG 등 에너지 수입에도 1000억달러를 쓰겠다고 했다. 국내 에너지 수요보다 많은 양을 수입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동안 중동에서 수입해오던 에너지 물량의 일부를 미국으로 공급처를 전환하는 것이다. 수출 경로가 길어져 비용이 늘어나는 문제는 있지만, 국제 원유 가격 차이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무리한 수준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이 통상 압박에 나선 첫 번째 이유가 ‘무역수지 불균형 해소’라는 점을 고려할 때, 미국산 에너지 수입은 가장 쉽게 무역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는 카드로 거론돼 왔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LNG 등 일부 중동산 에너지 수입을 미국산으로 전환하는 수준으로 막았다”라면서 “EU의 에너지 구매 규모가 7500억달러에 달하고, 일본이 항공기와 농산물 구매를 약속한 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낮은 부담으로 협상을 마무리했다고 평가한다”라고 말했다.

◇ “통상합의 최대 피해 업종은 자동차”
이번 통상 협상에서 한국 대표단의 목표는 FTA 체결국가로서 수출 경쟁국인 일본이나 EU보다 관세율을 낮추는 것이었다. 특히 대미 최대 수출 품목으로 일본·EU와 직접적인 경쟁 관계에 있는 자동차의 관세율을 낮춰 수출 경쟁 우위를 점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과 EU와 동일한 15%로 관세율이 확정됐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한국은 그동안 미국에 자동차를 관세를 내지 않고 수출해 왔다. 반면 일본과 유럽산 자동차에는 2.5%의 관세가 부과됐다. 이러한 관세 격차는 미국 시장 내 한국산차의 점유율을 늘리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이에 협상대표단은 일본과 EU의 자동차관세율 인상폭인 12.5%만 한국에 적용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미측이 거부하며 불발했다. 이와 관련, 김 실장은 “(우리는)12.5%를 끝까지 주장했는데, 미국식 의사결정 과정에서 ‘됐고, 우리는 이해하는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다’라고 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관세 하한선 15%가 관철됐고, 이번 통상 합의로 한·일·유럽 간 관세 격차는 사라지게 됐다. 미국의 자동차 시장에서의 한국산 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이 약해져 대미 수출이 감소할 것이라는 우려섞인 관측이 나온다.
이와 관련, 장상식 원장은 “이번 협상 최대 수혜 업종이 조선이라면, 최대 피해 업종은 자동차”라면서 “FTA를 바탕으로 한 한국산 차의 가격 우위가 사라지게 됐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 중 하나인 철강은 이번 합의에서 제외됐다. 철강에 대해선 품목별 관세 50%가 앞으로도 계속 부과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실질적으로 얻은 게 일본보다 많지 않은 상황에서 산업협력펀드 규모를 너무 크게 잡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미국과 통상 협상을 타결한 일본은 미측에 5500억달러 규모의 펀드 투자를 약속했다. 당초 4000억달러 규모를 요구했으나, 최종 협상테이블에서 5500억달러로 1500억달러가 증액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이 미국에 약속한 펀드 투자 규모는 3500억달러로, 일본이 약속한 규모의 63.6% 수준이다. 절대적인 규모는 작지만, 일본과 한국의 경제 규모 격차(2.2배)를 고려하면 한국이 약속한 규모가 작은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러한 지적을 의식해서인지, 김 실장은 “일본과 우리의 투자펀드 규모를 경제규모만으로 단순비교하는 것은 어렵다”라면서 “한국과 일본의 2024년 기준 (미국의) 무역적자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달러 투자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 더욱이 우리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업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의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 농축산물, 정상회담서 논의될까… 구윤철 “트럼프, 과채 검역 절차에 관심”
미국이 무역장벽(NTE)보고서에서 한국의 비관세 장벽으로 지목한 쌀·쇠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이슈는 이번 한미 통상 합의에 담기지 않았다. 협상대표단은 국민 정서 등을 고려해 이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고, 최종 합의에 넣지않는 것으로 관철시켰다고 설명했다.
방미 협상 대표단 수석대표인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현지시각) 워싱턴DC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진행한 브리핑에서 “농축산물에 대한 미측의 비관세장벽 축소 및 시장개방 확대 요구가 강하게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오늘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도 과채류에 대한 한국의 검역 절차에 대해 문의하며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라고 말했다.
구 부총리는 이어 “협상단의 끈질긴 설명 결과 미측은 우리 농업의 민감성을 이해하고 추가적인 시장 개방은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라면서 “다만 검역절차 개선 등을 포함해 기술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앞으로 협의를 계속 이루어 나가기로 했다”라고 덧붙였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이 SNS에서 “한국이 자동차와 트럭, 농산물을 포함한 미국 제품을 수용해 무역을 완전히 개방할 것”이라고 밝혔다는 점에서, 이 문제가 2주 후 열릴 한미 정상회담에서 의제로 다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 실장은 이러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선 “정치지도자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지층을 고려한 정치적 발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실장은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한국이 조성한 펀드의 수익금 중 90%를 미국이 가져간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펀드 자체의 구조가 아직 특정이 안 돼 있다”라면서 “누가 얼마를 투자하는 것 자체가 특정이 안 됐기 때문에 이익이 90대 10이라는 게, 미국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합리적으로 토론하기는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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