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에서 멈춘 전력망 갈등, 독일에서 해법을 찾다 [독일 현지 취재]

미래로 나아가는 길에 거대한 구멍이 있다. 어느 날 생긴 싱크홀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눈앞에 뻔히 보이던 구멍이다. 언젠가 저곳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질 줄 알면서도 우리는 그동안 모른 척, 안 보이는 척하며 현실을 방치했다.
10여 년 전 일을 떠올려보자. 밀양 송전탑 반대 싸움은 단일 국책사업에 대해 최장기간 최대 규모로 이어진 주민 저항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집 앞에 송전탑이 들어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은 분노했고, 한국전력(한전) 측은 이를 보상금을 앞세워 무마하려 했다. 공사를 강행하려는 한전과 반대하는 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10년 동안 벌어졌다. 383명이 입건되었으며, 현장 응급 이송 사례가 100건이 넘었다. 마을 주민 두 명이 분신과 음독으로 목숨을 끊었다.
우리는 밀양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전기 먹는 하마’ 인공지능(AI) 시대의 개막과 반도체산업 육성을 위해 전력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는 넘쳤지만, 전력망 확충 논의는 인기 없는 주제였다. 어떤 이들은 밀양 주민 때문에 전력망 건설이 멈춰 섰다며 밀양 사태를 기후위기 대응의 흑역사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밀양 사태를 촉발시킨 근본 원인, 즉 ‘주민 수용성’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지 사회적 논의는 거의 전무했다. 그러는 사이 전력 수요는 매년 최고점을 경신하고, 폭염과 홍수 등 극한기후 현상도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2년 대선 때부터 ‘에너지 고속도로’를 공약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2030년까지 서해안 전력망을, 2040년까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유(U)자형 전력망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2월에는 국회가 ‘국가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전력망 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전력망 사업에 속도를 내기 위해 인허가 및 규제를 대폭 줄인 것이 골자다. 한전은 지난 5월 2038년까지 전력망 확충에 72조8000억원을 투자한다고 밝혔다. AI(인공지능) 확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 재생에너지 발전량 증가, 전기차 보급 등에 따라 2년 전보다 투자비가 16조3000억원(28.8%) 늘었다. 2023년 대비 송전선로는 약 1.72배, 변전소는 약 1.43배 늘어나게 된다.
이는 모두 ‘거대한 구멍’을 메우기 위한 계획이다. 이 구멍의 이름은 ‘재생에너지와 전력망 부족’이다. 재생에너지는 기후위기 대응과 산업구조 개편에 필수적이지만, 한국의 재생에너지 비중은 OECD 꼴찌 수준에 머물고 있다. 수도권에 집중된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송전망 확충은 더욱 더디다. 지난해 대한상공회의소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발전설비는 154% 증가했으나 같은 기간 송전망은 26% 늘어나는 데 그쳤다. 이로 인해 재생에너지 발전이 늘어나도 전력망에 연결되지 못하는 ‘출력제한’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 가뜩이나 모자라는 국내 재생에너지가 송전망 부족으로 허공에 내다 버려지는 셈이다.
‘전력망 확충’이라는 발등의 불 앞에서 전국 각지는 분쟁의 전장으로 변하고 있다. 송전망 계획이 발표된 지역마다 주민대책위가 꾸려져 격렬한 반대운동에 나서고 있다. 특히 서남해안 태양광·풍력 발전단지와 전남 영광 한빛원전에서 수도권으로 전력이 가는 길목에 있는 전북의 경우 정읍·완주·무주·진안·부안·장수·임실·고창 등 8개 지역에서 송전탑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제9~10차 장기 송변전 설비계획에 따라 총 21개 노선, 627㎞ 초고압 송전선로와 대형 변전소 등이 건설될 예정인 전북 지역 8개 시군은 지난 5월 ‘송전탑 백지화 전북 대책위원회’를 출범하고 “수도권의 식민지가 되기를 거부한다”라고 밝혔다.
송전망 갈등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수도와 지역, 산업지역과 농촌 사이 에너지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 탓에 송전망 확충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도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다. 나름의 해결책을 모색한 나라도 있다. 대표적인 국가가 독일이다. 〈시사IN〉은 기후시민프로젝트와 함께 독일 현지를 찾았다. 시민사회단체 연대체인 기후시민프로젝트는 지역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전력망을 확충할 것을 촉구하는 단체다.
독일은 2000년 재생에너지법 입법을 필두로 바람과 햇빛의 ‘전기화’에 박차를 가하는 나라다. 2024년 기준 전체 전력에서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54%에 달한다. ‘2035년까지 재생에너지 100% 달성’이라는 원대한 목표도 세웠다. 곳곳에 흩어진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더욱 촘촘한 전력망의 확충이 독일에서 시급한 사회적 과제다. 재생에너지 강국 독일은 송전망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을까. 그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7월3일(현지 시각) 오전 독일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의 작은 소도시 베벨스플레트.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북해 쪽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풍력발전 적지인 이곳은 쥐트링크(Suedlink) 프로젝트의 북쪽 시작점에 속한 곳이다. 이 프로젝트는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독일 북부에서 산업이 발달한 남쪽(sued) 바이에른주 및 바덴뷔르템베르크주까지 700㎞ 길이의 초고압직류(HVDC) 송전망을 건설하는 독일 최대 전력망 사업이다. 2023년 하반기에 첫 삽을 떴고, 2028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에 빗대 ‘전기 아우토반’이라고도 불린다.
공사 현장 입구에는 쥐트링크 정보센터가 있었다. 사업에 대한 개괄은 물론 독일 전력 수요 현황,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 등을 두루 홍보하고 있었다. 공사가 진척될 때마다 마을 주민, 향우회, 관련 기관 관계자 등이 방문해 사업 정보를 공유한다고 전력망 운영사 테넷(TenneT)의 모아나 씨가 설명했다. 이곳에는 VR(가상현실) 체험 도구를 통해 지하 공사 현장을 탐방할 수 있는 기기도 설치돼 있었다. 인근 엘베강을 지하 20m 깊이로 관통하는 터널 공사에 대한 주민들의 염려를 불식하려는 목적이었다.
쥐트링크 프로젝트의 사업자는 초기부터 지역 정부, 주민, 환경단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머리를 맞댔다. 어느 지역에 송전탑이 지나면 안 되는지, 공사 차량이 진입해서는 안 되는 구간은 어디인지 등을 논의했다. 독일에서는 법에 따라 ①망 건설 수요계획 단계 ②송전망의 시작점과 종점 결정 단계 ③계획 확정 단계 등 세 차례에 걸쳐 일반 시민이 송전망 계획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송전망 계획 3차례에 걸쳐 시민 참여
온라인에 공개된 지리정보 시스템(SuedLink WebGIS)에 접속하면 사업 노선 및 공사에 쓰이는 장비 등은 물론 생태환경 관련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그림〉 참조). 가령 정보센터에서 약 5㎞ 떨어진 공사 예정지 몇 곳을 클릭했더니 ‘양서류 서식지에 대한 조사 수행’ ‘갈대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와 같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사업 시행과 관련해 지방자치단체, 관련 협회 등이 제출한 모든 정보를 공유하고 일반 시민이 직접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다. ‘SuedLink WebGIS’ 사이트는 송전망의 영향을 받는 400여 개 지자체와 공동 설계로 구축했다.

이날 쥐트링크 정보센터에는 마을 주민과 베벨스플레트의 시장이 인터뷰를 위해 방문했다. 주민 사스키 씨는 약 4년 전 송전망 계획에 대한 정보를 알았다. 테넷 직원들이 찾아와 사업 내용을 설명했다. 사스키 씨는 “구체적인 노선에 대한 정보보다는 쥐트링크 사업 이후 만들어질 미래상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라고 말했다.
행정 책임자인 볼튼 시장은 그보다 일찍 사업계획을 알았다. 볼튼 시장은 초기부터 송전망 운영사 측에 지역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예를 들어 운영사 측은 마을 북쪽에 있는 수로를 공사 기간에 막았다가 열기로 했는데, 볼튼 시장은 “그럴 경우 지하수가 다시 수로에 흐르기 어렵다”라며 불가 방침을 밝혔다. 결국 운영사는 지적을 받아들여 다른 경로로 공사 계획을 바꿨다. 볼튼 시장은 이후 39개 마을을 찾아 주민 1300여 명을 만나면서 쥐트링크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사업계획에 주민들이 직접 참여할 것도 독려했다.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주민 참여가 보장된다고 해도 어찌 됐든 송전망 건설은 마을의 땅이 파이고, 소음과 분진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송전망 사업 자체에 대한 반대는 없었을까. 사스키 씨와 볼튼 시장은 ‘에네르기벤데(Energiewende)’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에너지 전환’을 뜻하는 이 말은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지만 독일인에게는 익숙하다. 낡은 에너지에 작별을 고하고, 재생에너지를 확대해 탄소중립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담은 이 단어는 이제 ‘옥토버페스트’처럼 독일을 상징한다. 독일 공영방송의 메인 뉴스에 ‘에네르기벤데’라는 고정 코너가 있을 정도다. 에너지 전환을 25년 이상 본격 논의해온 독일 사회이기에 송전망 사업에 대한 시민의 태도가 긍정적인 것일까. 볼튼 시장과 사스키 씨는 “에너지 전환에 찬성하면서도 내 집 앞에 공사 차량이 드나드는 건 싫다는 사람은 늘 있다. 그래서 투명한 정보공개와 토론이 중요하다”라고 입을 모았다.

독일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한국의 현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밀양 때 그랬듯 한국의 송전망 건설 계획은 어느 날 날벼락처럼 ‘통보’된다. 독일 취재 후 전북 완주군에서 만난 박성래 대승한지마을 이장(완주 송전탑백지화 대책위원장)에게도 그랬다. 독일처럼 시종점 결정 단계에 주민이 참여할 수 있기는커녕 계획이 확정된 지 5개월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 “2023년 12월에 완주군과 마을 인근이 ‘송전선로 최적 경과대역’에 포함됐지만, 이듬해 5월8일에야 통보를 받았다. 한전 측에서 대단한 권한이라도 주는 것처럼 송전탑을 어디에 세울지 결정하라고 하더라. 주민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쥐트링크 정보센터 옆 송전망 공사 현장을 살펴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멀리 둥그런 구조물이 보였다. 그 유명한 브록도르프(brokdorf) 원전이었다. 과거 3만명이 몰려가 점거 시위를 벌이는 등 세계적으로 원전 반대 운동의 상징이었던 이 원전은 1986년 가동을 시작해 2022년 1월1일 꺼졌다. 2022년까지 탈원전 정책을 실현하겠다는 독일 정부의 약속에 따른 결과였다. 그러니까 독일은 탈원전의 상징적 장소에서 재생에너지를 송전하는 최대 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한 셈이다. 폐쇄된 브록도르프 원전 부지를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해주는 ESS(에너지 저장 장치) 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모아나 씨가 설명했다.
독일의 송전망 건설 계획이 갈등 없이 진행된 건 아니다. 한국이 수도권 대 비수도권의 갈등이라면, 독일은 남북 갈등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독일은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 바람이 잘 불고 인구가 적은 북부와 동부에 풍력발전을 대거 설치했다. 거기서 생산한 전기를 뮌헨·프랑크푸르트 등 산업단지가 밀집한 남부로 보내려면 초고압 송전선이 필요했다. 2012년 ‘전력망 개발 계획(Netzentwicklungsplan Strom)’에서 처음 논의가 시작된 북-남 송전망 프로젝트는 당초 계획대로면 2022년에 완공됐어야 한다.
독일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말 중에 ‘하이맛(Heimat·고향)’이 있다. 여러 맥락이 있지만 ‘훼손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강조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녹색당이 연정의 주요 세력이 될 만큼 세계적으로도 환경 감수성이 뛰어난 독일인에게 일부 지역의 송전망 건설 계획은 곧 ‘하이맛’의 파괴로 여겨졌다. 그런 까닭에 쥐트링크 프로젝트도 2015년 무렵부터 강력한 주민 반대에 부딪혔다. 지역 정부가 인허가를 지연시키고, 지역 정치인이 반대 의사를 밝히면서 사업이 지체됐다. 특히 재생에너지 생산 시설도 산업단지도 없는 지역, 또는 태양광 등으로 100% 에너지 자립에 성공해 더 이상 송전망이 필요 없는 소도시에서 “왜 우리가 피해를 입어야 하느냐”라며 반발이 거셌다. 자연경관 파괴, 전자파 유해성 등 한국에서도 익숙한 논란이 이어졌다.
독일 정부는 초강수를 뒀다. 경관을 해치고 전자파 논란을 일으키는 송전탑을 없애버렸다. 전체 700㎞ 길이 송전선을 모조리 지중화, 즉 땅에 파묻기로 했다. 송전탑이 필요치 않은 지중화(지중선로)는 공중에 전선을 잇는 가공선로보다 몇 배나 비용이 많이 든다. 독일 정부는 이와 함께 주민 참여 절차 등을 강화했지만, 결정적으로 주민 수용성을 높인 건 결국 지중화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쥐트링크 프로젝트는 계획한 지 10여 년 만에 착공했다.
한국에서도 송전망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지중화 요구가 제기된다. 특히 대도시 인구밀집지역과 농촌지역의 ‘지중화 불평등’ 문제가 쟁점이다. 지난해 박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전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서울의 지중화율은 62.2%인 반면, 경상북도는 7.8%였다. 격차가 약 8배에 이른다. 지중화율이 높은 지역은 서울 다음 대전(57.6%), 인천(47.1%), 세종(46.7%), 부산(45.3%)이었고, 낮은 지역은 경북 다음 충남(12.5%), 전북(12.4%), 강원(11.2%), 전남(9.3%) 등이었다.
지난 2월 강원도 홍천군민들은 HVDC 동해안-신가평 송전선로 건설 사업을 전면 지중화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경기도 가평군 묵안리 구간은 지중화 공사가 진행 중이며, 2단계 사업 지역인 경기도 양평, 하남 구간은 총 50㎞ 중 80%에 해당하는 40㎞를 지중화하는 공사가 계약 중인 것으로 안다. 왜 강원도에서는 지중화가 불가능한가”라고 따졌다.
‘지중화’는 독일에서도 뜨거운 감자
지금 독일에서도 지중화는 뜨거운 감자다. 물론 비용 때문이다. 기관마다 차이는 있지만, 독일에서는 앞으로 2045년까지 송배전망 비용으로 3140억 유로(약 506조원)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한다.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인데 여기에 지중화 작업까지 더해지면 재정 압박이 클 수밖에 없다. 앞서 베벨스플레트 지역의 주민과 시장은 지중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지만 독일에서 만난 기후에너지 전문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몇몇 불가피한 지역 외에는 지중화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 전환에는 비용이 든다. 석탄화력이나 원전처럼 한곳에서 많은 전기를 생산하는 게 아니라 곳곳에 흩어져 십시일반 발전을 수행하는 재생에너지는 더 많은 송배전망이 필요하다. 독일의 에너지 기후보호 싱크탱크인 ‘아고라 에네르기벤데(아고라)’에서 한국 담당 선임연구원으로 일하는 염광희 박사는 “독일의 경우 2030년대 중반부터 송배전망 비용이 내려가리라 전망한다”라며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송전선을 지중화하지 않을 것, 둘째는 망 투자금을 국가가 싼 이자로 대출해줄 것, 셋째는 전력 사용 시간대에 따른 전기료 차등제를 확대하는 등 망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것.
송전망에 더 많은 돈이 투자되는 건 소비자에게도 부담이다. 독일의 가정용 전기요금에는 한국엔 없는 것이 있다. ‘전력망 이용료(Grid Fee)’다. 전력망 확충 및 운영 등에 쓰이는 돈이다. 전기요금의 약 25%를 차지한다. 전기료가 10만원이면, 2만5000원이 전력망 이용료인 셈이다. 왜 송전망 운영사가 아닌 소비자가 이 돈을 내야 하는 걸까. 전력망 관리기구인 독일연방네트워크청(BNetzA)의 보도 헤르만 박사는 “최종 소비자가 전력 생산과 송전의 전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을 알게끔 하기 위해서다. 망 운영사들은 이 돈을 올리고 싶어 하지만, 과도한 이용료를 책정하지 못하도록 관리감독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독일의 에너지 전환 비용에는 이처럼 일반 시민이 치른 몫이 컸다.
깨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무한정 돈을 투자할 수 없는 한 송전망 건설 논의는 다시 주민 수용성 문제로 모아진다. 독일 아고라에서 전력총괄을 담당하는 필립 고드론 씨는 20년 전 전력망 운영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통해 주민 의식의 변화를 설명했다. “20년 전에는 주민들에게 많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a(시작점)와 b(종점)를 알려주는 수준이었다. 그 결과 많은 시민단체가 생겼고. 주민들이 소송을 걸기 시작했다. 그다음에는 송전망 기술자를 지역에 보내 주민 설명회를 열었다. 그러자 더 많은 시민단체가 생겨났다. 그 뒤로 많은 게 변했다. 에너지 전환의 목적을 설명하고 사전에 많은 정보를 제공하면서 주민의 동의를 구했다. 송전망 노선을 바꾸거나 지중화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이후에는 소송이 줄고, 건설 기간도 짧아졌다.”
독일 사회에서도 전력망은 그다지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니다. 기후에너지 전문가들은 그 중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정치인들이 관심을 가진 건 오래되지 않았다. 독일 현지에서 만난 한 언론 관계자는 “재생에너지 시대를 이끌고 있다고 자부하는 정치인들은 풍력발전기 앞에서 섹시하게 폼을 잡고 싶어 했을 뿐, 보기 싫은 송전탑 앞에 서고 싶어 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전력망 문제에 먼저 대응하기 시작한 건 기업이다. 테슬라, BMW 등 자동차 회사들이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북부지역으로 공장을 세우거나 옮기고 있다. BMW는 공장 옆에 직접 풍력발전기를 세우기도 했다. “기업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 정치권과 일반 시민들도 전력망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라고 앞서의 언론 관계자는 말했다.
어느 시골 마을 노인의 싸움
독일 베를린에서 차로 약 70분 거리에 있는 브란덴부르크주 센프텐휘테 마을. 주민 170여 명이 사는 이 작은 마을에는 독일 송전망 반대 투쟁의 상징적 인물이 있다. 올해 78세인 린드너 씨. 그는 고등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가르치다가 1993년에 이 마을로 이주했다. 울창한 숲과 탁 트인 들판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돼서다. 린드너 씨는 “380㎸ 초고압 송전선 지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며 방문객을 맞았다.
마을의 평화가 깨진 건 2008년 무렵이었다. 전력망 운영사인 50헤르츠(50Hertz)가 마을을 관통하는 115㎞ 초고압 송전선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독일 북동부에서 생산한 풍력발전 에너지를 보내기 위한 선로였다. 마을에는 이미 과거에 설치된 송전선이 지나고 있었지만 초고압 송전망으로 대체하기 위해 높이 60m, 너비 20m에 달하는 송전탑이 세워질 계획이었다. 더욱이 이 마을은 자연보호구역이었고, 송전선 계획 구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유럽 조류 보호구역이 세 곳이나 있었다. “처음 송전망 건설 계획을 들었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라고 린드너 씨는 말했다.

린드너 씨는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고 의회에도 도움을 청했다. 시민운동 단체인 ‘에너지 아래 생물권’과 함께 법적 대응에도 나섰다. 전자파로 인한 건강 문제, 기술적 대안(기존 송전선로를 이용하는 방법), 자연경관 보호, 조류 보호 등 네 개 영역에 걸쳐 외부에 조사 용역을 맡겼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2012년 법적 소송에 들어갔다.
긴 소송전 끝에 2016년 독일 연방법원은 브란덴부르크주 광업·지질·자연자원청의 송전망 건설 계획 승인 결정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전자파 문제나 기술적 대안 제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자연경관과 조류 보호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독일 언론 〈베를리너 차이퉁〉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전선을 멈췄다”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전력망 운영사는 일부 지역을 지중화하는 등 건설 계획을 변경해 재승인을 요청했다. 결국 2018년 연방법원은 수정된 계획을 승인했다. 멈췄던 공사는 다시 재개되고 송전망 건설은 완료됐다. 이후에도 린드너 씨는 소송을 이어갔지만 지난해 최종 패소했다.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아니었다면 법원에서 승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 이후 에너지 위기가 가속화하면서 당시 녹색당 출신 경제기후보호부 장관이 송전망 건설을 재촉하는 등 사회적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린드너 씨의 생각이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그에게 독일의 에너지 전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기후변화는 거짓말이 아니다. 에너지 전환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보호와 충돌하면 안 된다. 에너지를 한 지역에 집중하지 말고 분산할 수는 없는지, 송전망 건설 계획이 너무 과한 게 아닌지 따져봐야 한다.”
우리의 길도 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기후위기 대응의 길이든, AI와 반도체산업 육성의 길이든 방향은 같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길을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전력망 확충이 중대한 과제가 된 지금, 우리는 또다시 ‘압축성장’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독일이 지난 20년 동안 겪은 사회적 논란도 단시간 안에 지나야 한다는 이야기다. 다음 호에서는 국내 송전망 건설을 둘러싼 갈등 현장을 다룬다.
※ 이번 취재는 기후시민프로젝트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베를린·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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