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급으로 나눠진 미래의 도시, 우리에게는 이미 낯익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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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멍이 잘 드는 체질이 있다.
가리고 싶고, 빨리 없애고 싶은 멍 자국. 이 세상엔 '멍 같은' 취급을 받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평소 멍의 이미지가 깊이 각인됐기 때문이라고 손 작가는 말했다.
엑스 구역은 공공연하게 '도시의 멍'이라 불린다.
소설에는 '도시의 멍'을 인위적으로 없애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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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담시티 만큼 삭막한 ‘도시의 멍’… 디스토피아적 현실 상징적 그려내
본보 신춘문예 등단 후 잇따라 ‘상복’… “안드러났을 뿐 망한 작품도 많아”

가리고 싶고, 빨리 없애고 싶은 멍 자국…. 이 세상엔 ‘멍 같은’ 취급을 받는 존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평소 멍의 이미지가 깊이 각인됐기 때문이라고 손 작가는 말했다. 신작 장편소설 ‘세이프 시티’(창비)를 최근 낸 그를 29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이 소설의 배경은 정부의 통제 아래 재개발된 신시가지와 각종 범죄가 집중된 구시가지가 극명하게 구분된 도시다. 제일 안전한 ‘0등급’부터 우범지대인 ‘엑스(X) 구역’까지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앱이 있을 정도다. 엑스 구역은 공공연하게 ‘도시의 멍’이라 불린다. 모순적인 것은 ‘세이프 시티’를 표방하는 이 도시가 안전하고 쾌적하기는커녕 조커가 사는 고담시티만큼이나 삭막하기 그지없다는 것.
손 작가는 “사람들에겐 등급화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 같다”며 “사는 집, 사는 동네로 살아왔던 모습을 평가하고, 아이들끼리도 같은 단지 내에서 임대주택 아이들을 구분 짓기도 한다. 소설 속 설정은 이미 낯익은 모습”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속한 곳은 좋은 곳이었으면 하는 게 사람 심리다. 그는 “집값이 너무 올랐다고 비판하다가도 내가 집을 사면 이제는 집값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게 사람 마음”이라며 “그런 욕구를 가지는 게 너무 자연스럽긴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욕구가 참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소설에는 ‘도시의 멍’을 인위적으로 없애려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손 작가는 “0등급, 1등급 이런 식으로 등급을 나누는 순간 아무리 애를 써도 틀은 벗어날 수 없다”며 “한 구역을 좋게 만들어도 결국 차상위 구역이 다시 그 밑으로 가게 된다. 등급화라는 프레임 자체를 깨지 않으면 그 구분 안에 계속 남아 있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는 나쁜 기억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 있는 신기술, 이른바 ‘기억 교정술’이 등장한다. 어떤 이들은 ‘멍 같은 기억’을 지우고자 한다. 이에 대해 손 작가는 “지금 남아 있는 기억은 사실 어떤 식으로든 나한테 중요한 기억”이라며 “아무리 버리고 싶고 창피하고 떨쳐버리고 싶은 기억이라도, 어쨌든 내가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 충분히 창피해하고 후회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 그게 기억의 효용”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손 작가는 수상 이력이 화려한 작가다.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이상문학상, 대산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잇달아 받았다. 비결을 묻자 그는 “수면 위로 안 드러나서 그렇지 망한 작품도 많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는 소설을 쓸 때 작업 일기를 쓴다고 했다.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갈 땐 이렇게 쓰기도 한다. “그냥 쓰자. 이 소설은 그냥 망하기 위해 쓰는 거다. 그래도 스스로 배우는 게 있겠지. 여기서 배운 게 다음 소설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이 되겠지.”
“제가 일희일비하고 쉽게 좌절하는 면이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다른 식으로 바꿔 보려고 수년에 걸쳐 노력하는 거예요. 어떤 면이 남들보다 부족한지 잘 알고 있는 게 저의 장점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멍이 들어도 앞으로 나아간 비결이겠다 싶은 답변이었다.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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