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방연’ 주인공, 면앙정 송순

노성태 2025. 7. 3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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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원장의 남도인물열전] <28> 송순
면앙정 전경
77세에 의정부 우참찬이 되다

면앙정의 주인공 면앙정 송순(宋純, 1493-1583)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가 문학의 대가다. 그는 국문 시가인 ‘면앙정가’ 9수,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등 단가(시조) 20여 수, ‘면앙정삼언가’, ‘면앙정제영’ 등 500수가 넘는 한시를 지은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러나 송순은 시인이기 이전에 50여 년을 관직에 몸담은 관료였다. 조광조가 축출된 기묘년(1519)에 실시된 기묘별과에 급제한 후 받은 첫 관직은 정9품의 승문원 권지정자였고,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후 송순은 1526년(중종 21) 홍문관 수찬을 시작으로 49세에 사간원 대사간과 사헌부 대사헌에 오른다.

그는 이 가운데 15년을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삼사에게 근무했다. 이 15년이 송순의 관직 생활의 전성 시기였다.
면앙정

송순이 모든 관료들이 부러워하는 삼사에 15년여를 근무했고, 사간원과 사헌부의 장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신비복위소’를 올려 절의를 실천한 스승 박상의 올곧음과 강직함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1527년(중종 22) 홍문관 수찬 시절, 당당하게 대신을 논박하는 ‘조선왕조실록’의 다음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응교 이희건은 즉일로 하향하였고, 남아 있는 자들은 연약하여 눈치를 살피거나 남에게 견제되어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는데, 수찬 허자와 송순 등이 홀로 대간으로서 반론하였다.”

이조참판이던 1550년(명종 5), 송순은 이기·진복창에 의해 탄핵을 당한 후 충청도 서천으로 유배된다. 명분은 “부정한 의론을 제기하여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것이었지만, 이기와는 아들과 얽힌 땅 소유 관련 소송 때문이었고, 진복창과는 직접 대사헌을 다툰 관계이자 윤원형이 진복창의 추천을 반대하는 등 사적인 원한이 작동한 결과였다.

송순의 유배는 부당한 것이었고, 2년도 채 되지 않아 풀려났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송순은 선산부사, 전주부윤, 나주목사에 임명된다. 그리고 받은 마지막 관직은 정2품직인 의정부 우참찬이었다. 당시 송순의 나이 77세였다.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된 후 병을 핑계로 물러났지만, 27세 정9품직인 승정원 권지정자에서 시작된 관직 생활이 77세 의정부 우참찬까지 50년간이나 이어졌다. 대단한 관복이다.

면앙정을 짓다
면앙정에 건립된 ‘면앙정가비’

송순의 상징 장소는 말년을 보낸 면앙정(?仰亭)이다. 송순은 부친 시묘살이 중인 1524년(중종 19) 면앙정 터를 구입한다. 송순의 면앙정 터 구입 과정을 제자 기대승(奇大升)은 ‘면앙정기’에 다음처럼 남기고 있다.

“내 일찍이 공(송순)을 면앙정 위에서 찾아뵈었는데, 공은 나(기대승)에게 말씀하였다. ‘옛날 이 정자가 없을 때에 곽씨 성을 가진 자가 이곳에 살고 있었네. 그는 일찍이 꿈에 자금어대(紫金魚袋)와 옥대(玉帶)를 띤 학자들이 이 위에서 모여 노는 것을 보고는 자기 집안이 장차 일어날 것이요, 그 아들이 이 꿈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네. 그리하여 아들을 승려에게 부탁하여 글을 배우게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또 곤궁하게 되자, 마침내 그곳에 있는 나무를 베어버리고 사는 곳을 옮겼다네. 내가 갑신년(1524)에 돈을 주고 이곳을 샀더니, 동네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서로 축하하기를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땅을 공이 마침내 얻었으니, 이것은 아마도 곽씨의 꿈이 조짐이 된 것일 것이다 하였다네….”

면앙정 터는 원래 송순의 소유가 아닌 곽씨의 소유였다. 곽씨가 자금어대와 옥대를 띤 학자들이 이 위에서 노는 꿈을 꾸고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는데, 그 기대가 어긋나자, 이 땅을 송순에게 팔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곽씨가 꾼 꿈은 송순의 꿈이 된 셈이다.

1533년(중종 28), 송순은 사간원 사간에서 파직된 후 김안로가 권력을 잡자, 귀향한다. 그리고 곽씨에게 구입한 터에 면앙정을 짓는다. 당시 면앙정은 풀로 엮은 초정(草亭)이었다. 그런데 5년 뒤 송순이 다시 떠나자, 면앙정은 다시 쑥대가 무성하게 된다.

송순이 다시 면앙정을 찾은 것은 이기 등의 모함으로 유배가 풀린 1551년(명종 6)이었다. 이듬해인 1552년, 담양부사 오겸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면앙정이 중건된다.

송순이 기뻐하는 모습을 제자였던 기대승은 ‘면앙정기’에 “나(송순)는 이곳에 한가로이 노닐며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여생을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평소 소원이 이제야 이루어진 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소의 소원이 이뤄졌다’고 기쁨을 표현할 정도였다. 송순의 나이 60세였다.

중건 후의 면앙정의 모습도 ‘면앙정기’에 다음처럼 남아 있다.
송순 시비(광주 사직공원)

“면앙정은 모두 세 칸인데, 긴 들보를 얹어서 들보가 문미(門楣, 창문 위에 가로 댄 나무)보다 배나 높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를 보면 단정하고 확 트였으며 판판하고 바르며 그 모서리는 깎아지른 듯하여 마치 새가 나래를 펴고 나는 듯하다. 사면(四面)을 비우고 난간을 세웠으며, 난간 밖은 지형이 다 약간의 벼랑인데, 서북쪽은 특히 절벽이다. 빽빽한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있고, 삼나무가 울창하다….”

이 무렵 하서 김인후는 ‘면앙정 30영’을 짓는다.

회방연을 열다

조선 말기 유학자이며 관료였던 운양 김윤식은 가정에 드문 경사로 회갑·회근·회방 등 ‘삼회’(三回)를 꼽았다. 회갑(回甲)은 태어나서 60주년이 되는 해를, 회방(回榜)은 과거 급제 60주년이 되는 해를, 회근(回?)은 부부가 혼례를 치른 지 60주년이 되는 해를 말한다. 회근은 회혼(回婚)이라고도 부른다.

‘회’는 ‘돌아왔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회갑은 ‘갑’(甲)으로 돌아왔다, 즉 60갑자 중 자신이 처음 태어난 간지로 돌아왔다는 뜻을 지닌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사람에게 출생이나 출사, 혼인 등이 처음 이뤄졌던 때의 간지가 다시 시작되는 60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회방은 일반 사람들이 장수하면 경험할 수 있는 회갑이나 회혼과는 달리 과거에 급제해 관료생활을 경험하고 장수한 극히 일부만이 누릴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급제하기도 어려웠지만, 급제 후 60년의 삶을 누리기도 어려웠다. 이런 점에서 회방은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아주 특별한 의례였다.

문헌에 보이는 최초의 회방연 주인공도 송순이었다. 송순의 회방연 잔치 모습을 송순의 ‘연보’에서는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기묘(1579) 만력 7년(선조 12년) 선생(송순)의 나이 87세이다. 시월에 선생의 가족들이 회방연을 면앙정에서 베풀었다. 금상(선조)께서 호조에 명하시어 어사화와 술을 내리시고 축하하는 것이 꼭 급제에 합격할 때 내리신 것과 같았다.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백호 임제 그리고 전라도관찰사 규암 송인수와 함께 각 고을 수령 백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전라도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밤이 깊어지자 선생께서 약간 취기가 있어 따뜻한 방으로 들어가시고자 하시니 정공(정철)께서 말씀하여 가로되 공(송순)을 남여(藍輿, 가마)로 모시자면서, 우리 모두가 가마를 메자고 하였다. 일시에 모두가 가마를 붙들고 내려가니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여 광영스럽다며 이야기하기를, 이는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라 하였다.”
정조대왕이 시제로 낸 ‘하여면앙정’ 편액.

가족 친지나 제자뿐만 아닌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도 축하객으로 참석하는 등 송순의 회방연은 전라도민의 축제였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저녁 무렵 정철이 스승인 송순을 집으로 모시기 위해 하인들이 메고 온 남여를 메자고 제안하자, 나머지 제자들과 참석한 축하객들이 남여를 메고 집으로 모셨다는 부분이다. 당시 남여를 메는 것은 임금이라 할지라도 천출인 노비의 몫이었다. 그런데 송순은 제자들과 연회에 참석한 하객들이 함께 멘 남여를 탄 것이다.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고 광영스럽다며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한 이유다.

후일 정조는 광주에서 특별 과거를 실시하라고 명하면서 손수 ‘면앙정에서 남여를 메다’인 ‘하여면앙정’(荷輿?仰亭)을 시제로 낼 정도였다.

특별한 과거 공령과를 실시하다

정조는 “광주에 공령과(功令科)를 시행해 충신의 후손을 선양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정조가 광주에서 특별한 과거인 공령과를 실시한 것은, 정조가 주관해 간행할 도서를 교열한 호남 유생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뜻과 옛 충신의 후손을 발굴하여 선양하고자 하는 의도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호남을 ‘인재의 부고(府庫)’요, 광주를 ‘호남 명현 배출의 고을’이라고 부를 만큼 신뢰했고, 유생들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또한, 그런 호남의 명성을 전국에 천양(闡揚)해 서울이나 지방 할 것 없이 전국의 모든 유생이 학문에 정진하는 풍토를 만들고자 하였다.

특별한 시험 공령과는 1798년(정조 22) 4월13일, 광주목 객사인 광산관에서 치러졌다. 당시 광주 목사 서형수가 임금을 대신해서 시험을 주관했다. 공령과는 초장, 중장, 종장으로 3차에 걸쳐 실시됐고, 시험 과정은 엄중하게 관리됐다. 시험에 참여한 70여 명에 맞춰 과장(科場)내에 천막을 설치하고 각 1인씩 앉아 시험을 보게 했으며 군교로 하여금 감독하게 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시험은 시(詩)·부(賦)·전(箋)·의(義)·책(策) 등 다섯 과목이었고, 3일 동안 치러졌다. 시는 ‘하여면앙정’(荷輿?仰亭), 부는 ‘장군수‘(將軍樹), 전은 ‘조경묘’(肇慶廟) 건립, 의는 ‘시경’의 ‘아도이거 막여남토’(我圖爾居 莫如南土, 내 그대 거처를 물색하니 이 남방 땅 만한 곳이 없도다)였고, 책은 ‘문호남7폐책’(問湖南七弊策, 호남의 7가지 폐단을 묻다)이었다.

다섯 과목 중 초장에 치러진 과목이 시와 부였다. 시의 주제 ‘하여면앙정’은 1579년(선조 12) 송순의 회방연 당시 정철과 고경명 등 제자들이 스승의 남여를 멘 사실을 200년 뒤 정조가 공령과의 시제로 문제를 낸 것이다. 정조가 출제한 시제 ‘하여면앙정’은 제자들의 스승 공경에 대한 칭찬이었고, 호남 선비들의 풍류에 대한 화답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송순이 있어 면앙정에서 과거 급제 60년을 기념하는 회방연이 있었고, 그 회방연 때 제자들이 멘 남여는 전설이 되어 200년 뒤 광주 광산관에서 치러진 특별 과거시험의 시제(詩題)가 된다.

송순으로 인해 치러진 회방연과 특별 과거시험의 인연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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