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돌아왔다

백범준 작명철학원 해우소 원장 2025. 7. 30.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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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가난한 노비의 딸. 이름 없는 집안의 여식으로 태어나 이름 있는 집안의 종으로 살았다. 팔자 따라 시집살이를 몇 번이나 거쳤고 가노(家奴)와도 혼인해 살았다. 몸을 팔아 목숨을 이었다. 살고 싶었다. 노래 배우고 춤을 익혔다. 창기(娼妓)가 되었다. 어느 날 궁궐의 마당에 섰다. 연회가 있었고 왕이 있었다. 춤으로 홀렸고 노래로 녹였다. 왕은 웃었고 신하들은 숨죽였다. 항간에는 미녀라고도 했으나 아니었다. 살결도 고르지 못했다. 허나 그녀의 얼굴에는 과거가 없었다. 서럽던 세월도 고단한 허기도 스미지 않았다. 동안이었다.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사람의 숨을 읽었고 뜻을 읽었다. 눈치는 빨랐고 혀끝은 유려했다. 사람 홀리는 재주였다. 왕이 마음을 주었다. 그녀에게 종3품 숙용(淑容) 품계를 내린다. 후궁이 되었다. 장녹수다.

그녀는 연산과 숨을 섞고 말을 섞고 몸을 섞었다. 상처 입은 연산의 영혼을 어루만져줬다. 그녀가 어루만져준 사내 연산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였다. 혀로 다그치고 칼로 거느리며 피로 다스리던 자였다. 그녀는 피로 다스리는 자의 피를 말렸다. 혀끝 놀림 하나로 그녀와 인연 된 집에는 벼슬이 내려졌고 이웃한 집은 헐렸다. 헐린 자리에는 그녀와 인연된 자의 집이 지어졌다. 그녀가 알던 자와 아는 자와 혹은 알고자 하는 자 또는 아직은 알지 못하나 곧 알게 될 자들은 하루아침에 신분이 상승했다. 밤에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이 아침이면 어명이 되었다. 그녀와의 인연 하나에 집안이 흥하거나 망했고 사람이 살거나 죽었다. 사람들은 낮은 데서 올라온 그 여인을 두려워했다. 언제부턴가 말이 돌았다. 그녀는 연산에게 반말로 꾸짖었고 연산은 그 말에 복종한다고 했다. 꼬리를 문 말은 또 다른 꼬리를 물었으나 조선은 이미 피로 다스리는 나라였다. 연산의 뜻인지 녹수의 뜻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래도 조선은 망하지 않았다. 망하지는 않았으나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던 나라에 일이 터진다. 중종반정이다. 1506년 9월이었다. 장녹수는 무참히 끌려나왔다. 처형당했다. 그녀의 시신은 백성의 돌에 짓이겨졌다. 이 나라 피가 여기서 다 탕진됐다며 그녀의 성기는 거듭 짓이겨졌다. 돌은 쌓였고 피는 돌 위에서 말랐다. 시신은 사라졌고 역사는 침묵했다. 이름 앞에 숙용(淑容)이라고 적바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창(娼)이라 불렀고 기(妓)라고 불렀다.

몇 백 년이 지났다. 조선은 사라졌다. 신분도 사라졌다. 왕도 사라졌다. 그런데 왕 없는 나라에 왕이 되고 싶었던 자가 있었다. 스스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자다. 손바닥에 적은 말이 세상에 드러났으나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은 왕이 되었다. 그 곁에 한 여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여사라 불렀고 영부인이라 불렀다. 보통 가정에서 자란 보통여인으로 배운 자라고 했다. 사업가이고 학력은 학사이자 석사이며 박사라 했다. 그녀는 낮은 데서 올라온 여인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말이 돌았다. 그녀의 학력은 흐릿하고 경력은 흐트러졌고 재산은 설명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가족을 둘러싼 이야기가 하나둘씩 떠돌았고 그녀의 가족과 엮였던 이들의 억울함도 한이 되어 뒤섞여 떠돌았다. 정부의 계획도 바뀌었다. 길이 휘어지고 그 길의 끝자락이 뒤틀렸다.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 일은 그녀의 가족과 무관하지 않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권력을 가진 자들은 대답하지 않았고 듣지도 않았다. 그들의 말과 다른 세상의 모든 소리는 가짜뉴스가 됐다.

세월은 녹수의 이름을 지웠고 발자국을 숨겼다. 그렇게 사람들은 그녀를 잊었다.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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