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C] '괴물' 엡스타인으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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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나는 스스로를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생존자다." 얼굴과 실명을 드러낸 채 다큐멘터리 인터뷰에 응한 사람만 10여 명이었고, 엡스타인 사후 열린 심리에서 법정에 나서 직접 증언한 이도 20명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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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몇 주째 미국 뉴스를 뒤덮고 있는 이름, 제프리 엡스타인에 대해 알아보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제프리 엡스타인: 괴물이 된 억만장자'(2020)를 틀었다. 4시간 내리 화면을 들여다보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최소 1990년대부터 자행된 엡스타인의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는 수차례 적신호를 내며 수면 위로 올랐지만, 연방당국은 20여 년 뒤에야 제대로 된 수사에 돌입했다. 그마저도 2019년 재판 시작 전 당사자가 자살하면서 법의 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았다.
고통 가득한 장면들 속에도 빛나는 순간들은 있었다. 엡스타인의 보석 심리 증언을 위해 법정에 들어서던 여성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손을 잡은 채 환히 웃었다. “나는 스스로를 피해자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생존자다.” 얼굴과 실명을 드러낸 채 다큐멘터리 인터뷰에 응한 사람만 10여 명이었고, 엡스타인 사후 열린 심리에서 법정에 나서 직접 증언한 이도 20명이 넘었다.
이 '생존자'들이 증언대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전체 피해자 규모는 100명 이상이었지만 많은 여성들이 성착취 피해 이후 망가지거나 사라졌다. 자극적 보도 앞에서 이들은 쉽게 2차 가해 대상이 됐고, 엡스타인의 재산을 노렸다거나 심지어 정치 공작이라는 누명도 뒤집어써야 했다. 한국 사회에서도 수없이 봐온 익숙한 패턴이다.
그러나 이들은 함께 싸워주는 사람들과 살아남아 증언했고, 엡스타인 사망 6년이 지난 현재까지 “심판은 계속되어야 한다”며 진실 규명을 외치고 있다. 엡스타인의 오랜 착취를 가능케 했던 '고위층' 카르텔의 존재를 끊임없이 들쑤시면서. 이들의 증언은 '엡스타인 파일'로 대표되는, 권력과 자본이 공모한 성착취 구조가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는 대중의 의혹에 불을 지피고 있다. 그 결과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층도 요즘은 꽤나 흔들리는 모양새다.
아직도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적은 “바뀌는 게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함이다. 사회가 앞장서 변화 가능성을 보여줘야 한다. 최근 프랑스는 10년간 이어진 집단 성폭력을 공개적으로 고발하고 나선 평범한 70대 여성 지젤 펠리코에게 국가 최고 훈장(레지옹 도뇌르)을 수여했다. “수치심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가져야 한다. 모든 여성이 나를 보고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는 펠리코 발언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피해자 증언엔 개인의 고백을 넘어선 '힘'이 있다. 사회가 이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다음 피해자도 생존자가 되어 나설 용기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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