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명화산책] 비운의 천재 에곤 실레의 ‘죽음과 여인’

“클림트가 없었다면 실레도 없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간판 화가로 꼽힌다. 클림트가 실레보다 28세나 위였지만, 스승과 제자라기 보다는 ‘동료’ 사이에 가까웠다. 클림트는 무명의 실레를 유명 화가로 이끈 은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에로티시즘’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졌지만 화풍은 정반대였다. 황금빛 원색을 주로 사용한 클림트가 화사하고 낭만적이었다면, ‘누드화’로 유명한 실레는 음울하고 노골적이었다. 다만 사랑의 이면에 필연적으로 자리잡는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했다는 점은 같았다.

세상을 뜨기 3년전 그린 ‘죽음과 여인’(Death and Girl)은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림속 남성은 실레 자신이다. 여성은 이별을 앞둔 사랑하는 연인이자 모델로, 4년간 동거했던 발리 노이칠이다. 서로 끌어안고 있지만 애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가냘픈 팔로 남자에 애절하게 매달려 있고, 남자의 등 뒤 손가락은 깍지를 끼고 있다. 여인의 가느다란 팔이 보여 주는 건 실낱같은 희망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절규하는 여인의 절망이 화면 가득하다. 남자는 초점 없는 눈으로 엉거주춤하게 버티며 여자의 머리에 손을 대고 있을 뿐이다. 기우뚱한 자세에 자칫 바로 쓰러질 것만 같다. 삶과 죽음의 대비인 빨간 옷과 블랙으로 이별의 슬픔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 사랑의, 삶의 공허함이 풍긴다. 실레는 뭉크처럼 자신의 고통스런 사랑의 체험을 그림에 담아냈다.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주로 그렸던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년)는 20세기 초 빈 화단에 충격을 가한 표현주의 화가다. 불안한 눈동자, 말라비틀어진 몸, 구겨지고 널브러진 자세, 구불구불하고 거친 선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에로틱함보다는 그로데스크한 느낌이 더 강하다. 누드화는 남녀 가를 것 없이 성기를 드러내고 자위 행위와 동성애까지 묘사한, 노골적이지만 에로틱하지 않다. 육체의 아름다움보다는 고통을 나타낸다. 멍이 든 것처럼 피부는 울긋불긋하고, 몸은 기형적이다. 눈빛도 정상이 아니다. “나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렸다. 예술가는 살아있는 예술 작품 하나로 영원히 살 수 있다. 내 그림들은 성스러운 사원 같은 곳에 걸려야 한다”고 했던 실레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이 최고라는 걸 믿어 의심하지 않았고, 팔리지 않아도 비싼 값에 그림을 내놓았다. “내가 너무 앞서가서 내 작품을보는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라고도 장담하기도 했다. 실레는 2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유화 300점, 드로잉 2000점을 남겼다.
1890년 6월 오스트리아 남부의 작은 도시 툴른의 부유한 철도 집안에서 태어난 실레는 두살때부터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철도 역장이었다. 역 앞의 집에 살던 내성적인 실레는 기차와 선로, 신호등을 그리는 게 취미였다. 기차 장남감을 좋아하고 기적 성대모사도 잘했다. 하지만 매독에 걸린 아버지로 인해 가계가 어려워지면서 인생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정신병까지 걸린 아버지는 결국 실레가 15세때인 1905년 세상을 떴다. 실레가 성(性)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게 된 건 성병에 걸린 아버지로부터 비롯됐다. 평생에 걸쳐 성에 집착하고, 인간에 내재된 근원적인 고통과 마주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죽음을 부르는 성에 대한 두려움, 그러면서도 성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 이로 인한 불안을 실레는 짧은 평생에 걸쳐 예술로 승화시켰다.
실레는1906년 16세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가 들어가고 싶어했지만 번번히 고배를 마시고 입학할 수 없었던 학교다. 하지만 곧 보수적인 학교 분위기에 실증이 나게 된다. 이런 그가 탈출구를 찾은 곳은 클림트가 이끌던 ‘빈 분리파’다. 실레가 클림트를 만난 건 자퇴전인 1907년이다. 실레는 클림트로부터 인생 철학은 물론 회화에 에로티시즘을 담는 미술 기법을 배운다.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성의 트라우마가 점차 봉인 해제된다. 성욕 역시 인간의 본성인데 왜 유독 금기시하고 숨겨야 하는가라고 실레는 물었다. 클림트는 그에게 우상이었다. 스승이 돼달라고 하자 클림트는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의 스승이 될 순 없다며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했다. 이후 두 사람은 같은 해 세상을 떠날때까지 우정을 이어가게 된다.
클림트의 ‘다나에’는 그리스 신화의 다나에와 제우스에서 암시를 받아 성적 본능을 과감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실레는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같은 제목의 ‘다나에’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완성도가 높지 않았다.
실레가 인간의 맨몸, 벌거벗은 신체라는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간 것은 클림트와의 만남 이후다. 클림트 외에 누드화에 영향을 미친 또다른 인물은 오스카 코코슈카, 반 고흐와 뭉크를 꼽을 수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중요 부위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코코슈카의 누드 드로잉은 실레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09년 클림트가 주도한 ‘제2회 쿤스트샤우(Kunstschau)’ 전시회에 참여했던 실레는 고흐와 뭉크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본 것 그대로가 아니라 생각한 것을 그리는 표현주의는 내면의 감정 표현에 방해되는 것을 모두 버리게 했다.

하지만 전통에 어긋나며, 볼품없고 흉측하며, 살은 거의 없고 비쩍 말라 비틀어지기까지 한, 병약하고 창백해 보이는 누드화는 당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는 ‘포르노’라는 욕설도 들어야 했다. 게다가 누드화의 선은 굵게 두드러졌다. 실레는 그림은 대상의 해체를 통해 본질을 표현하려 했다. 그게 ‘나’라는 본질을 더 잘 표현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런 ‘대상의 해체’는 짧은 활동 기간동안 무려 100여점을 남긴 자화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자신의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그림 일기와 같은 자화상에는 나르시시즘과 벗어날 수 없는 성적 충동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동시에 느껴진다. 피골이 상접하고 중요 부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자화상은 마치 좀비 같다.

1917년 발표된 ‘포옹’도 대표작 중 하나다. 두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있는데, 몸은 마르고 왜곡돼 있다. 윤곽선은 단순하고 깔끔한 게 아니라 울퉁불퉁하게 뒤틀려져 있다. 머리카락과 신체, 그리고 이불의 주름은 섬세하다. 두 남녀가 끌어안고 있는 에로틱한 분위기의 클림트의 ‘키스’와는 대비된다. 남녀가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를 그린 실레의 작품은 열정이 느껴지기 보다는 웬지 공허스럽다. 마치 정신이 사라지고 육체만 남아 행위에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평론가들은 곁으론 우아하지만 뒤로는 매춘 등 온갖 비도덕적 행위를 일삼은 당시 빈 상류층 사회를 고발했다고 평가한다.
실레의 화풍은 클림트가 소개해준 발리 노이칠을 만난 동거를 시작한 후 달라진다. 우울과 비극, 뒤틀림이 사라진 것이다. ‘발리의 초상’엔 발리를 향한 설렘이 담겨 있다.

실레는 빈을 떠나 어머니의 고향인 크루마우(현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로 둥지를 옮겼다가 다시 빈 서쪽의 시골 마을 노이렝바흐에 정착하면서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실레는 누드화와 인물화에 뒤치지 않을 만큼 풍경화도 잘 그렸다. 풍경화 역시 밝은 색감보다는 어둡고 음울한 색채가 많이 보인다. 특유의 왜곡된 묘사가 풍경화에서도 나타난다. 밝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보다는 시들거나 저물어가는 식물, 환하게 떠 있는 태양보다는 지는 해의 모습을 그렸다. ‘가을해와 나무들’은 뼈만 남은 자화상이나 누드화와 비슷하게 황량한 느낌이다. 하지만 ‘네 그루의 나무’, ‘꽃밭’처럼 독특한 색감을 지닌 풍경화도 있다. 앝으막한 언덕 위에 네 그루 나무가 서 있고, 구름 낀 어스름한 저녁 하늘에 멀리 보이는 산 위로 지는 태양을 그린 ‘네 그루의 나무’는 오랜 여운을 준다. 인상적이고, 세련되며, 아름답고 독창적이다. 색감은 환상적이기도 하다. 평론가 하인리히 베네슈는 “실레가 보여주는 색채와 형태의 아름다움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재능은 경이롭다”고 했다.
노이렝바흐에서 어린 아이들의 누드화를 그린다는 주민들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돼 21일간의 구류와 3일의 징역형을 받은 이후 누드화의 수위는 낮아지고 흐느적 거리는 관능보다는 명확한 선과 색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앉아 있는 한쌍의 남녀’에선 말라 비틀어진 인물이 사라졌다. 그 후 실레에 대한 평가는 ‘오해받는 천재 화가’, ‘박해받는 예술의 순교자’로 180도 뒤바뀌게 된다.
1918년은 실레에 최고의 해다. 빈 분리파 전시에서 메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또 중산층 가정의 에디트 하름스를 만나 안정된 삶도 찾는다. 하지만 결혼 나흘만에 징집돼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으며, 곧 죽음이 찾아왔다. 2300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 6개월째인 하름스가 세상을 뜨고, 결국 실레도 독감에 걸려 그녀가 떠난지 고작 사흘 후 스물여덟의 나이로 눈을 감게 된다.

‘가족’은 실레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의 작품 통틀어 가장 평온한 모습이다. 실레는 맨 뒤에서 자신감 넘치게 가족을 껴안고 있으며,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엄마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사후엔 그의 생을 그려낸 소설과 영화도 나왔다. 영화 ‘에곤 실레 : 욕망이 그린 그림’은 힐데 베르거의 소설 ‘죽음과 소녀 - 에곤 실레와 여자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실레의 인생에서 큰 영향을 끼쳤던 4명의 여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클림트와의 만남과 작업에 대한 고뇌 등도 담겨 있다.
평생 ‘외설이냐 예술이냐’는 비난에 시달렸던 실레. 이런 세평에 맞서 그는 “예술가를 억압하는 건 범죄다. 이러한 행위는 태어나는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다”고 외쳤다. 미술평론가인 조원재씨는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영향으로 성적 본능과 죽음의 공포 등을 차분하게 표현한 클림트와 달리 실레는 격정적 감정과 욕구를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드러낸 게 특징”이라며 “습작으로 치부되는 드로잉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것도 실레의 힘”이라고 전했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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